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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주체는 ‘도망자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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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주체는 도망자 무리

 

왜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한중일 간에 있어 왔다. ‘왜구라 함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킬까?고려사는 왜구의 주체 세력이 누군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일본 사신이 고려를 방문한 것은 공민왕 17년인 1368, ()의 승려 본토(梵盪)와 본류(梵鏐)가 방문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왜구 금지[禁寇]를 요청하는 고려 정부의 공식 문서에 대한 회답[回書]을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지금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377(우왕 3) 6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안길상(安吉祥)이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갔던 첩장(牒狀)을 통해 그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첩장에는 고려 금룡(金龍)이 일본을 방문한 것에 대한 회답으로 왜측의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 왜구를 금지할 것을 약속했고 그 결과 왜구가 줄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왜구도(倭寇圖)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왜구도권(倭寇圖卷)중 일부. ‘왜구()’()’의 합성어이다. ‘라는 글자는 고대 일본에 대한 호칭으로 서기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에서 쓰여져 왔다.떼도둑(群賊)’ 또는 겁탈함(劫取)’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왜구라는 단어는 왜인들의 집단 도둑 행위’, ‘왜인들의 도둑 집단내지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침구 행위를 총칭하는 말로 쓰인다.

 

왜구를 가리키는 명칭도 다양하다. 중국 측 사료에서는 왜구를 진왜(眞倭), 왜적(倭賊), 왜노(倭奴), 구왜(句倭), 잔구(殘寇), 적범(賊帆), 황이(荒夷), 위왜(爲倭), 가왜(假倭), 장왜(裝倭) 등으로 부르고 있다. 때로는 규슈(九州)와 시코쿠(四國)의 해적들로 한정해 쓰기도 한다. 중국어로 왜구라는 말에는 난쟁이라는 경멸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다.

 

왜구의 행동 양태에서 파생된 명칭으로는 위왜, 가왜, 장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왜구를 가장한 도적을 뜻한다.고려사에는 왜적, 왜노, 해적, 해도(海盜) 또는 단순하게 적, (), 적선(賊船), 작구(作寇) 등으로 표기되며 모두 구적(寇賊) 행위를 하는 집단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혼란 시기 왜구를 가장한 가왜(假倭)와 왜구에 의부한 부왜(附倭)들에 의한 피해도 발견되고 있다.

 

왜구는 일본열도 내 바다를 배경으로 활동한 비법적(非法的) 무장 세력으로 오랜 시간 한중일 역사에 약탈의 주역으로 등장해 왔다. 왜구는 여전히 현재성을 띠고 있는 개념이자, 오늘날 일본의 극우주의적 움직임에 따라 평화 파괴적 행동을 동반하는 집단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일본의 왜구 근성은 그들이 이해하는 무력적 교류’, ‘접촉에 대한 사고와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칫 미래사를 파괴적으로 만들 우려마저 있다. 근현대 들어 나타난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는 왜구식 근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21세기 왜구 근성을 경계하는 것은 이 같은 오랜 침구 경험 때문이다. 일본은 오랜 시간 일본이란 국가 이미지와 중첩되어온 왜구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까?

 

 

고려사는 이들 왜구의 실체를 규슈 지방에서 할거한 사변해도(西邊海道)의 완민(頑民)’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완민이란 규슈의 바다를 배경으로 활동하는 거주인을 비롯해 그 지역 일대에 살고 있는 제()세력을 가리킨다.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1375~6년이 되면 왜구의 주체가 완민에서 포도배(逋逃輩)’로 바뀐다는 점이다. 포도배란 누구를 가리킬까? 말 그대로 도망자 무리를 뜻한다. 따라서 포도배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이후 왜구의 주체는 도망자 집단인 것을 알 수 있다.

 

13818월 일본 막부는 료슌에게 명령해 고려에 건너가 마구 어지럽히는 악당인(惡黨人)’들을 금지시키도록 명령한다. ‘악당(惡黨)’이란 당시 일본 전역에 나타난 비법(非法) 행위를 자행하는 무리였다. 오늘날 우리가 악한 사람의 무리라는 뜻으로 쓰는 악당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자신의 땅을 이탈해 약탈 행위를 일삼았다. 료슌은 왜구로 말미암아 고려가 입게 된 피해를 인정하고, 그 주동자들을 도망자 무리로 밝히면서 규슈탐제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세력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 기록은 악당이 고려에 침구해 왜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일본에 나타나는 거의 유일해 보이는 왜구 관련 기록이기도 하다. 이는 왜구의 주체를 밝히는데 매우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

 

왜구사를 살펴볼 때면 유독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오랜 시간 비법 행위를 저지른 집단에 대한 기록이 일본 내에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이 특정 목적을 갖고 왜구를 연구하고 있지만, 왜구에 관한 자료는 그 행위 주체자가 아닌 피해자 내지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사료밖에 거의 없다.이 점은 대단히 의심스럽다. 단순히 이런 저런 이유로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일까? 그보다는 왜구가 반인륜적 집단이기에 국가적 이해를 해적 집단을 통해 관철해 온 침구의 역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라도 지우고자 한 것 아닐까? 이처럼 일본은 자국에 불리한 역사는 은폐하거나, 지워 버린 의심을 받을 여지가 크다. 가해자가 기록을 안 남긴 상황에서 일본이 약탈집단인 왜구의 본질을 왜곡, 호도하는 한 한중일간 역사 인식의 골은 좀처럼 메워지기 어렵다. 역사 왜곡의 뿌리는 일본 열도를 휘감을 만큼 넓고도 깊다.

 

그러고 보면 대체 어느 나라가 자신의 도적 행각을 보란 듯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나마 이런 기록이 남아 있어서 사실 관계를 규명할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일본으로서는 도적떼를 자기 집안사람이라고 인정한 꼴이 되었으니, 왜곡을 지향하는 일본 역사 전개 방식에서 보면 대단히 불리하게 받아들였을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이 존재가 현재 일본 ()왜구의 길고 긴 연원을 따지는 증거가 되고 있느니 만큼 일본으로서는 어지간히도 속상할 법도 하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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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직접적인 접점에 놓여있다. 이 점은 양국 관계에서 불가피한 지리적 여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라는 이유로 문명사적 교류도 활발했지만, 그로 인해 한반도는 왜구 침구의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어 왔다. 14세기 중엽부터 고려는 반원자주운동을 추진했으나, 40여 년 동안 계속된 홍건적의 침입은 서북지방으로부터 개경에 이르는 연도 인근의 제읍(諸邑)들을 모조리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먹을 것이 없는 극도의 기아 상태에서 백성들은 죽은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이어 갔고, 시체를 파먹은 개들은 미쳐서 개경 시내를 어슬렁거릴 정도였다.

 

홍건적에 의한 피해도 컸지만, 왜구에 의한 침입과 피해는 이보다 규모나 횟수면에서 더 컸다. 왜구 출몰지역의 농어민들은 약탈과 살육을 피해 내륙으로 이주했고, 이에 따라 해안지역은 무인지경이 되어버렸다. 국토의 가장자리가 도륙 당했고, 침구 지역은 내륙으로 확대됐으며, 학살당한 백성들의 피로 강물이 넘쳐났다. 이에 고려는 방어태세를 점차 강화해 그 결과 1389년에 이르면 왜구는 돌연 그 침구 방향을 중국으로 돌린다. 그 무렵 중국으로 가는 원거리 항해에 부담을 느끼면서 왜구가 중국 해안지역을 침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처럼 고려의 방어 태세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침구 방향을 돌렸다고 해서 왜구 침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다. 일본열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왜구에게 식량 등이 부족할 시에는 중간보급기지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과 일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는 항시 왜구 침구의 대상이 되었다. 왜구로서는 한반도가 반드시 취해야 할 전략적 침구거점이었던 것이다. 왜구는 점차 약탈대상지역을 고려 내륙지역으로 확대했고, 그로 말미암아 해상 교통망과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漕運)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어 버린다. 이는 결국 고려 조정으로서는 지방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지 못해 국가 재정이 파탄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침구에 따라 식량난도 극도로 심각해 졌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의 삶은 매일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고려는 14세기 말엽까지 가까스로 왜구의 침략 위협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끝내 왕조는 쇠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기진한 고려를 대체해 조선이 새로 개국되며 ()왜구전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왜구의 침구를 받기는 조선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이 개국되었어도 왜구의 침구가 잦아든 것은 아니다. 고려는 해변의 섬들이 적의 기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섬 주민을 뭍으로 이주시켜서 비워 버리는 이른바 공도정책(空島政策)’ 차원에서 해금책(海禁策)’을 취했는데, 조선도 같은 정책을 이었다. 1371왜환(倭患)’에 대해 명() 정부가 취한 기본 정책도 해금책이었다. 이로써 조선과 명은 피치 못하게 함께 해금(海禁)시대를 본격 개막하게 된다.

 

본래 이 정책은 내국인이 왜구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 사무역 하는 걸 금지하기 위해 대내적 통제책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명 조정은 연해와 도서 주민을 내륙으로 이주시킨 것이다.그런데 당초 의도와 달리 해금책은 중국의 해양무역을 저해하고 생활 터전을 잃은 해안 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불법적으로 해상활동에 뛰어 들게 한 면이 있다. 또 바다를 비움으로써 해군력의 급속한 약화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연해 천여 리가 모두 도적의 소굴이 되는상황을 초래했다. 이에 대해 명 정부는 뒤늦게 금구교섭에 나섰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명사(明史)》⟨일본전(日本傳)에는 왜구로 인해 명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왜인이 매년 상습적으로 침략하였고, 연해의 간악한 무리들도 왕왕 그들과 결탁하였다··· 바다의 큰 도적들은 왜의 복식을 하고 깃발을 휘두르며 배를 나누어 타고 내지를 노략질해서 큰 이익을 취하였기 때문에, 왜의 환란이 날로 극성해졌다··· 그때 외적의 세력이 만연하여, 장저(江浙)지역은 유린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왜구로 인해 바다를 포기하는 수세적인 방법으로는 왜구를 근절시킬 수 없었다. 바다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근본적인 대책은 사라지고 더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한편, 우리로서도 육로 중심의 정책을 취함으로써 해양으로 뻗어 나가는 기상이 어느새 사라지고만 것이 가장 큰 손실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조에 들어서면 대외 관계에 있어서 오로지 육로로 명()에 사신을 보내 대국으로 섬기면서 중화문화의 아류임을 자처하게 된다. 실로 통탄할만한 일이었다.

 

왜구 침구로 우리가 입은 가장 큰 폐해는 무엇이었을까? 문화적 자폐주의(自閉主義)에 빠져 해양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대신, 중화의 권위를 빌어 내지(內地)의 백성들을 통제하는 획일적인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에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해양은 왜구 발호로 인한 해금책의 영향으로 조선과 명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했고, 이는 일본의 비법적·불법적·탈법적 행동을 더욱 방관·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해금책은 해외와 문물교류를 해야 국가 자체가 운영될 수 있는 일본으로서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륙과의 교류에 의해 국가적 유지와 발전이 수혈되어 온 섬나라 일본으로서는 심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에도 그 본질이 평화를 가장하면서도 침략을 근성으로 하던 왜로서는 보다 일탈적 세력을 방조하고, 후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본 내 불량 집단은 점차 해양 침략세력으로 발전해 간다.

 

왜구 침구 행위가 큰 문제가 되자 조선과 명은 방향을 선회해 무력 징벌과 함께 제한적 해양교류라는 회유책을 통해 왜구 침탈을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한된 정책으로는 왜구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왜구의 욕구가 무한대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조선과 명은 그들이 일으킨 크고 작은 도발을 감수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이른바 왜변(倭變)’이니 왜란(倭亂)’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그 중 특히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한때 조선왕조를 존망지로에 처하게 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국제전쟁이었다. 이는 조선과 명이 취한 해금책이 오히려 양국의 목을 조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왜구 발호를 막기 위한 조치로 취한 해양 차단의 결과, 수군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왜구 침구에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조선은 철저히 해금책을 실시했지만, 그 빈틈을 해양 침략세력인 왜구는 강력한 도전으로 대응해 왔다. 그리하여 왜구의 지속적인 침구는 마침내 임진왜란이라는 대전쟁의 참화를 빗기에 이른다. 그나마 남해에서 왜의 숨통을 끊어 버린 이순신의 활약상에 힘입어 임진왜란 실질 전투는 종식되고 말지만, 그렇다고 왜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것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이순신이 숨을 거둔 직후인 15981221일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은 대마도를 쳐부수어 훗날의 근심을 없애자는 대마도 정벌론을 주청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3일 후 항왜병 소기(小棄)와 조선인 박선을 왜인으로 위장시켜 대마도에 정탐 차 보낸다. 그러나 이듬해(1599) 24일까지도 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선조의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마도 정벌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미온적 전쟁 종결로 화근을 그대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끝나지 않은 전쟁은 그 질긴 명맥을 유지하다가 300년 후에 일본의 조선 재침으로 나타난다. 이는 왜구를 막기 위한 소극적 정책이 더 크게 왜구 발호를 가져오고, 그 결과 국가 차원의 전란 사태로 커져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왜구의 불씨를 잡지 않음으로써 국가적 전란으로 확대되는 양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모르쇠전략

 

왜구 활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일본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고려 정부의 왜구 금압 요구를 받은 일본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왜구 문제에 대해 자국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압을 요청하는 고려 측의 주장에 대해 일본 조정의 공식 입장은 회답하지 않고 막부의 처리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조치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는 13681월 중 승() 본토(梵盪)와 본류(梵鏐)를 고려에 보빙사로 보내 막부의 회답공문을 바쳤다.하지만 막부의 회답은 고려 정부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왜구를 금지하겠다는 적극적 의지라기보다는 왜구가 규슈, 시코쿠(四國) 등지에 할거 하고 있는 무리들이어서 교토의 막부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 아시까가 막부는 규슈나 시코쿠의 영주들이 조종하는 해적떼를 다스릴 수 없었다.

 

이 같은 막부의 태도는 양국 관계에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주변국의 왜구 금지 요구에 대해 막부는 어떤 이해도 갖지 않았고, 특별히 영향력도 발휘하지 않았다. 다만 외교적 수사(修辭)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시도나 상황 전변을 기대하려는 소극적 행동이 전부였다. 막부는 조정을, 조정은 막부를, 막부는 다시 영주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면피로 일관한 셈이다. 이는 조선과 외교 관계에서 막부가 일본국을 대표해 온 점과 천황의 지위가 막부의 감시 하에 있기도 하는 등 일본 내부의 문제점 때문이기도 하다. 즉 국왕이 실권자였던 우리 권력구조와는 다른 일본 정치체제의 이중 구조이기도 하지만, 일본이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측 주장처럼 왜구 발생 책임은 영주들의 몫임으로 막부와 일본 조정은 왜구 책임론에서 벗어나도 되는 것일까? 왜구와 천황과의 관련성은 그로부터 500년 뒤인 1868년 명치천황으로 불리는 일왕 무쓰히토(睦仁)의 발언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무쓰히토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기리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를 교토에 조영할 것을 지시했는데, 신사 재흥(再興)을 위한 명령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도요토미 다이코(太閣,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없이 천하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았으며, 옛 성현들의 위업을 계승하여 받들고, 황위를 해외에 선양하고, 수백 년 후 또한 저들(조선인과 중국인)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였다.)

 

이는 왜구 침구의 결정판으로 임진왜란을 이끈 배후가 누구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일본 권력 구조가 이중성을 띠고 있으므로 드러나지 않는 때가 많지만, 결국엔 침구 세력의 뒤에 천왕이 있는 것이다. 당시 무쓰히토 천황이 조성케 한 도요쿠니 신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126천명의 귀와 코를 베어다 묻은 이총(耳塚)’ 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 도요쿠니 신사를 짓게 함으로써 천황은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토요토미의 침략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다른 한편, 이 귀무덤은 우리에게는 한이 서린 곳인데, 근대 시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이 귀무덤이 적에게도 자인박애(慈仁博愛)의 정신을 발휘한 증거이자, 적십자 정신의 선구라고 내외에 선전하며, 영문으로 팸플릿을 만들어 해외에도 돌리기까지 했다.천인공로할 만행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막부시기, 막부에 휘둘리기도 하고 명색뿐이기도 한 면도 있지만, 천황은 막부의 그늘에 숨어서 일본의 침략적 이해를 철저히 대변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막부에서 천황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정권 교체(大政奉還)’가 명치유신인데 근대 천황상이 창출되던 시기, 일왕이 현창하고자 했던 자는 조선 침략의 원흉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였던 것이다. 이는 중세 시기와 근대 일본의 침략주의가 매우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장관이었던 기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는 한일 병탄이 있던 191010나는 도요 공의 신령을 받들어 일본 민족 해외 발전의 수본존(守本尊)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실제로 합방 후인 19182월 그는 앞서 한국을 병합함으로써 일본이 점차 아시아 대륙으로 발전함에 따라 도요 공을 추모하고 그 묘사(墓社)에 참배하는 자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며 의기양양하게 자평하고 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일본 군부는 합방 전후로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내에 축성한 왜성(倭城)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1935년 들어서 조선총독부는 울산 왜성을 비롯해 11곳의 왜성을 유적지로 제정(1939년까지)해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로 하여금 왜성 보존 활동과 관광 개발을 활발하게 전개하도록했다. 근대에 들어서도 임진왜란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봉건 시대 일본의 천황은 하나의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왜구 침략에 관해 천황 책임론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황 책임론이 불식되려면 여기에는 역사적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 근대 명치유신 이후 천황이 국가 원수(元首)이자 군수통수권자로서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한 적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현재 일본 헌법이 정하듯, ‘일본국 및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만 국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막부 정권 이후 명치유신기에 접어들면 천황은 대외 침략의 최종 결정자이자, 실행자로 직접 나서서 활동하게 된다.

 

지금의 천황은 상징적 존재이기는 하나 형식상 어디까지나 일본의 최고 통치자다. 우리의 국가원수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카운터 파트너는 천황이었고 신임 주일대사가 신임장을 제정하는 것도 천황이다.

 

이 같은 구체적인 침략행위와 위상은 과거 천황을 역사적 책임과 무관한 존재로써 자리매김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과거 막부시기에도 지금의 일본 헌법이 정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천황은 같은 위상을 지녔기 때문이다. 집권에 성공한 각 시기 일본 막부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지 않고 천황 일가를 유지하고 관리해 온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막부의 공모(共謀)와 왜구 지원

일본 막부시기, 무용(武勇)을 과시하며 할거한 봉건 영주들은 더 많은 토지와 인민을 차지하기 위해 해적단을 해외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왜구는 고려를 비롯해 명나라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출몰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가져왔다. 나아가 일본 봉건 영주들과 상인들은 해적떼를 지지하고 조직하기도 했다. 왜구는 이처럼 일본 지배계급과 연관된 해적떼이며 침략 집단이었다. 왜구는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 발생한 약탈집단이 아니라, 일본 봉건제도와 상업자본의 발전이 왜곡되며 나타난 필연적 현상이자, 침략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1380년대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 왜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는 일본 내 민간 활동인 잇키(一揆)’야토(夜討해적(海賊) 금지조항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본래 잇키는 이치미도신(一味同心)이라는 연대감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이룰 수 없는 일상성을 초월한 문제나, 현실적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에 잇키를 결성했다. 때문에 현실적 조건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고자 했다. 잇키는 일본 사회 내부의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그 간접 여파로 왜구 문제까지 규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일종에 민간 차원의 자성적 움직임이라고나 할까? 왜구가 감소한 원인으로 잇키는 이렇게 일부 작용하고 있다. 비록 방법은 미신적이며 종교적 성격을 띤 것이지만, 왜구를 금구시키는 데에는 나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셈이다. 일종에 요즘 시민단체 활동과 같은 것으로,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경화 경향에 대해 양식 있는 시민사회 단체들이 자성의 목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과 성격이 같다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일본 우경화의 해법으로 일본 내 평화 지향의 시민사회 단체 활동을 기대해 본다.

 

오늘날 왜구는 가해자이거나 피해자로서 한중일 각국의 자국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런 면에서 불행한 과거지만, 역으로 동아시아 공존의 해법을 찾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왜구 문제가 동아시아의 미래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이미 20세기 들어 우리가 지난한 고통 속에서 경험해 본 바다. 더구나 이들 근대 왜구“2차 대전을 통해 세계사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럴 때 미래의 불안요인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다.

 

근대 일본이 지향한 제국주의의 뿌리에는 항시 왜구 근성이 내재되어 있다. 일본이 생산해 낸 왜구 시스템은 실로 면면(綿綿)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왜구는 특히 한중 양국사와 이 지역 인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쳐왔다. 왜구는 크거나 작은 도적떼의 잦은 출몰이 끝내 국가적 전란을 예고하고 확산·증폭시켜 왔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하게 취급해야만 한다. ‘왜구문제가 과거사가 아니라, 21세기 생존 문제로 다급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왜구 근거지 및 침구도

 

일본 내 왜구의 근거지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이견이 있다. 대개 막부의 통제력이 약했던 일본 연해변의 삼도(三島)를 가리킨다. 삼도는 대마도(對馬이키(一岐마쓰우라(松浦) 세 곳을 가리킨다. 혹은 여기에 시모노세키(下關, 당시 亦間關)를 넣기도 한다. 근처의 고토(五島히라도(平戶북큐슈(北九州시코쿠(四國) 등지의 해적까지 포함해 삼도(三島)왜구로 통 털어 일컫기도 한.지도 왼쪽 위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 서해 연변은 왜구의 직접적인 본거지였다.

오늘날 일본은왜구 진출지도라고 칭하고 있지만, 왜구의 동남아시아 침범도를 보면 한반도, 중국대륙, 일본열도를 비롯해, 멀리 러시아의 연해주와 동남아시아까지 약탈 무대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와 관련되어서는 특히 고려의 경우, 전 해역이 왜구 침구로 인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어려울 정도였다.

오랜 세월 왜구는 한중일 관계사에서 바다를 매개로 벌어지는 약탈사의 주요 측면을 이루며 삼국 관계를 바다로 확장시켜 바라보는 시점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각기 자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역사상 이처럼 바다를 배경으로 오랫동안 잔학무도하게 약탈을 한 특이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왜구의 침구 지역은 이후 일본 제국주의 침탈 시기 침략과 점령을 했던 지역과 많은 부분 겹쳐진다. 과거사가 현재사와 분리될 수 없는 관련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바다가 왜 안정되고 평화스러울 수 없었는지에 대한 뚜렷한 방증이 되기도 한다. 일본 내 극우주의가 발호하고 있는 이즈음, 일본은 과거와 달리 이 지역에서 평화의 길을 선택하게 될까?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가까운 이웃과 만고불변의 원수-1620년간 계속된 왜구 침략에 과연 끝이라는 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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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이웃과 만고불변의 원수 - 1620년간 계속된 왜구 침략에 과연 끝이라는 게 있는가?

 

1592년 임진왜란 징후 파악과 발발에 대해 조선 정부의 대응은 무능한 것이었다. 인접 국가인 일본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세세히 탐망하고 방비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은 방비를 게을리 한 탓에 임진왜란의 참혹한 전화를 겪는다.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선조 23년) 3월 조선정부는 왜에 통신사를 파견한다. 사절단의 파견 목적은 토요토미가 전쟁을 수행할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윤길과 김성일간 상반된 정세예측 보고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이 시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전쟁 준비를 완료해 놓은 상태였다.

 

일본 내부의 사정에도 눈이 어두웠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 갈 때, 다양한 교섭 대상들을 위한 선물 가지고 갔는데, 그 대상이 된 가문 중에는 오우치, 쇼니, 교고쿠, 호소가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 네 가문이 이미 권력을 잃고 토지를 상실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16세기 후반까지도 이 네 가문의 이름으로 조선 국왕에게 조공 사절을 보냈던 것이다. 더구나 포르투갈에서 도입된 조총이 군사 전술상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와 일본 전국시대를 마감한 획기적인 병기이자 조선침략이 현실화될 때 강력한 무력수단으로 사용될 거라는 점도 인지하지 못했다. 이처럼 조선은 대부분 일본 전국시대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게다가 토요토미가 보내 온 서계를 단순히 위협을 가하는 것이라 해석하여 예(禮)로서 설유, 위무하는 방책을 취하기로 하는 등 정세 판단 면에서 패착을 범했다.

 

이 같은 대응은 현실감이 떨어진 것으로 조선이 임란 전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는 것을 드러래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착오와 혼동은 근대 개항기 일본의 노골적인 음모에 대해 조선이 보여준 혼미스런 정세 판단력과도 같다. 결과적으로 임란 이후 300년 만인 1876년 강화도조약을 강제 체결당하게 되고, 1910년 을사늑약을 강요당하면서 35년간 국권 상실의 초비상 사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왜구의 잦은 침구의 결정판인 임진왜란은 조선의 전국토를 황폐화시켜 버렸고, 동아시아 세계 질서를 재편했다. 국제전쟁화 된 후유증으로 중국에서는 명(明)에서 청(淸)으로 왕조가 바뀌었고, 침략국인 일본에서는 임란의 원흉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이 들어서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한중일 삼국의 국민 간에 커다란 상호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인식은 2차 대전시 일본의 만행이 가중되며 오늘날 한․일 간 뿌리 깊은 갈등의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 한중일 삼국은 국가 구성원들이 갖게 된 인식이나 국제관계 등 모든 면에서 다시는 임진왜란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었지만, 우리가 행한 반성은 함량 미달되는 것이었다. 조선은 임란 전 일본의 움직임을 주청사를 파견해 명나라에 보고했듯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정권과 교섭할 때에도 끊임없이 명에 보고하는 등 줏대 없는 짓을 행했다. 그러며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해 ‘백년을 두고도 잊기 어려운 원수(百世難忘讐)’, ‘만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원수(萬世不忘之仇)’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에 대한 불신감, 광포하기 이를 데 없는 무용, 문물을 약탈하고 파괴한 조속성에 대한 증오 등이 한민족의 일본관의 본질로 자리 잡게 된다. 이 같은 심적 대응은 실질보다는 감정적 대응이 강하는 점에서 인화성은 강하지만만, 지속적인 현실 차원의 대응력은 뒤떨어진다는 단점과 위험성이 있다. 이 점은 우리가 철저히 반성해야 할 점이다. 요는 감정적 면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현실 대응력인 것이다.

 

임란 이후 중국의 대일관도 뚜렷이 기조가 세워졌다. 중국의 대(對)일본관은 지독하게 나쁘게 형성돼 “왜놈은 교활하고 거짓되어 헤아리기 어렵다” 일본군은 “탐욕적으로 약탈하였다”는 등 부정적 인식이 대세다. 일본의 침략적 본성이 여과 없이 중국 민중들 뇌리에 틀어박힌 결과다. 여기에 2차 대전시 남경대학살 등 참혹한 살육 경험은 중국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일본인의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이는 어느 누구의 탓이라기보다 철저하게 일본의 만행이 불러온 결과였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지닌 ‘만고불변의 원수론’에 대한 ‘일본 책임론’은 피할 길이 없다.

 

우리로서도 지난 역사를 통해 철저히 반성해야 할 것이 있다. ‘한․일전(韓日戰)’ 때마다 극명하게 드러나듯, 오랜 시간 우리가 지녀왔던 심리적 우월 의식이나, 극일(克日)의 당위론적 인식내지 보상심리가 채워진다고 해서 문제의 해법을 찾게 되는 건 아니다. 일본이 유지해 온 ‘왜구 근성’은 전란을 쉽게 잊고 마는 우리의 약점을 항시 허점으로 노려왔고 이용해 왔다. ‘독도문제’를 둘러 싼 군대 주둔 여부로 한동안 국가의 최대 문제와 관련되어 통일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점이 왜구 문제를 살피며 자성적 목소리로 경계해야 할 바다. 자칫 경솔하게 굴다간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불장난에 말려들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전체가 일본 ‘재침론’의 전화에 휩싸일 위험성마저 있다.

 

일본으로서도 ‘만고불변의 원수론’을 불식시키고 ‘가까운 이웃론’으로 동아시아 국가와 관계설정을 위한 노력을 다 하여야 한다. 내부적으로 21세기 ‘신(新)왜구’를 단속하지 못한다면 2차 대전 패망의 결과가 보여주듯 그 결과는 일본(민)들의 불행으로 직접적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어디 원숭이나 쥐보다 더 나은 학습법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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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원숭이나 쥐보다 더 나은 학습법 없소?

 

시간의 경과만으론 결코 밝아오지 않는 그런 아침이 있다. 우리의 눈을 감게 하는 빛은 암흑에 불과하다.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는 그날만이 밝아 오는 것이다. 새날이 밝아오기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 태양은 하나의 샛별일 뿐이다.

- B.F.스키너

 

심리학 분야의 거목 B.F.스키너 교수는 1948년에 쓴월덴 투(Walden Two)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인간과 세계, 나아가 세계를 변혁시키는 주역으로서 인간을 꿰뚫어 본 말이다. 세상과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며 자신과 세상을 바꾸어온 주역인 인간을 다룬다. 이런 인간 존재를 알기 위해선 동물과 대별되는 인간의 인지 능력과 그것이 불러오는 학습 능력을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 인간의 학습 능력은 어떤 인지를 통해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지 예측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어떻게 학습하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학습과 관련된 지적이고 상징적인 문제들에 주목해 왔다. 물론 학습과 관련된 습관들, 기능 및 기호 등 제 문제도 아울러 검토하고 있다. 학습에 관해 어떤 정의는 경험의 결과로서 행동의 변용이라고 말한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의 변용된 행동이라고 비슷한 풀이를 내놓기도 한다. 또 다른 심리학자들은 학습의 본질은 인지적이며 인식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이처럼 학습 과정에 대한 정의는 적지 않다. 학습 과정과 관련되어 유명한 몇몇 실험들이 있다.

 

현대 학습심리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누구나 이견 없이 이반 파블로프를 최우선으로 꼽을 것이다. 그의 유명한 실험은 고기가 개의 입에 들어가기 직전에 벨을 울림으로써 벨과 고기 사이의 상관관계를 성립시킨데 있다. 학습이 이루어지자 개는 벨 소리만 들어도 타액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몇 실험에서는 벨이 울려도 고기가 나오지 않는 일이 되풀이되자, 개는 결국 다시 벨이 울려도 타액을 분비하지 않았다. 파블로프는 벨에 대한 개의 반응을 우리가 잘 아는 저 유명한 조건 반사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다. 나아가 이 같은 조건 설정학습의 원리로 생각했다. 그는 이 연구로 조건 반사를 강화하기도 하고 약화시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면서 수많은 절차를 개발해 냈다. 이런 짓궂은 실험은 개로서는 죽을 맛이었을 테지만, 우리는 학습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조금은 알게 됐다.(내가 집에서 이 같은 실험을 했더니 우리 집 개는 나중에는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결코 누구나 흉내 낼 실험은 아닌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 돈 다이크는 파블로프와 마찬가지로 자극과 반응의 객관적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학습을 문제 해결 수단으로 간주해 1898년 저 유명한 실험에서 굶주린 고양이를 상자 속에 집어넣고 관찰했다. 상자 속 고양이는 어느 정도 되풀이하자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학습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다음 불과 수초 만에 상자를 벗어났다. 다이크는 이 실험을 통해 고양이가 시행착오를 통해 특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학습한 거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시행착오는 학습자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심적 연합또는 결합을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그가 학습은 결합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이런 자기 확신에 찬 실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실험에서 고양이는 상자를 벗어난 운동이 스스로 어떤 운동이었는지 자각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동물들은 학습을 통해 자기들의 행동을 어느 정도 적응시키기는 하지만, 학습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변함없이 본능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런 예는 침팬지나 원숭이 행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침팬지는 고대로부터 인간의 목적을 위해 특수한 임무를 수행해 왔다. (유인원 연구학자 크레이그 스텐포드에 의하면, 침팬지에게 원숭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간 친구에게 유인원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도 더 모욕적인 처사라고 한다. 진화론적으로 침팬지는 인간과 가까운 유인원, 즉 사람과(hominid, 人科)에 속한다.)이집트 벽화를 보면, 영리한 원숭이가 인간 대신 나무에 올라가 과일을 따든가 재목을 쌓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사육주를 위해 야자열매를 따 모으고, 호주에서는 양치기 역할을 하거나 트랙터까지 조종한다. 그러나 원숭이의 깨우침은 인간의 아기 이상으로 인지가 발달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훈련을 거듭해도 인간처럼 복잡한 언어 체계를 가질 수도 없다. 인간과 원숭이의 학습 차이는 지능의 기초인 전뇌(前腦)차이이고, 이 차이는 극복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1920년대 들어서면 행동주의 학습이론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존 B. 왓슨이 등장한다. 그는 마음은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심리학자가 무시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마음은 행동을 연구할 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자극에 따라 반응하는 존재로 보고, 학습이란 인간의 바람직한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적절한 자극과 반응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풀이했다.

이 같은 기계적 인간관은 세상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가 이렇게 확신에 차서 지껄였을 때 대중의 비난은 그에게로 퍼부어졌다.

 

나에게 1 다스의 건강한 아이들과 그들을 키울 목적에 충분히 알맞게 만들어진 나만의 세계가 주어진다면, 어떤 아이도 희망대로의 전문가로 만들어 보이겠다. 의사, 변호사, 예술가, 실업가, 그렇지 않으면 거지, 도둑놈이라도 좋다.”

 

심지어 그의 아들조차도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고계에 뛰어들어 한껏 목청을 올렸고 사회적으로는 성공했다. 비록 왓슨의 주장은 큰 물의를 일으켰지만, 심리적 탐구 대상을 의식에 두어야 한다는 이전의 심리학을 뛰어넘어 심리학의 과학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수행했다.

 

왓슨 전후의 행동주의자들은 학습 과정을 기본적 요소로 분해함으로써 원인과 결과를 한층 명확히 식별하고자 했다. 1920년대 들어서자 게슈탈트학파는 전체로 보고자하는 시도를 취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자 중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람은 W.쾰러였다. 그는 아프리카 북서해안 앞바다의 테네리페 섬에서 유인원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학습이론을 개발해 냈다. 원숭이가 사고 과정을 통해 활동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원숭이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그런 실질적인 예였다. 그는 이것을 원숭이의 통찰력 있는 행동이라고 칭했다.

 

1959년에 들어서면 쥐 심리학자톨먼이 등장한다. 그는 이전의 이론을 전부 녹여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유명한국부지도포괄지도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국부지도를 지닌 동물은 좁고 똑바른 길 줄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포괄지도를 지닌 동물은 더 보편적인 눈을 통해 사물을 보며 때로 방식을 바꾸며 문제를 해결한다. 어느 지도나 특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조금이라도 문제가 변하면 국부지도는 순식간에 쓸모없어지고 그 역할은 포괄지도가 맡아서 하게 된다. 예컨대 쥐 실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쥐는 미로 학습을 할 때 먹이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문제를 거듭 해도 학습 성적이 오르지 않지만, 목표지점에서 먹이를 주면 발군의 성적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쥐는 심지어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에도 잠재 학습을 하고 있다가 먹이가 주어지면 그 즉시성과를 드러냈다. 톨먼에 의하면, 쥐들은 지도를 완성하고 있다가 동기가 부여되자 바로 그 순간에 그 지도를 사용한 것이다. 이 이론은 만약 국부지도가 아니라 포괄지도를 사용하면, 훨씬 더 강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 거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와 달리 하버드대학의 B.F.스키너 교수는 보수를 통해 목표로 삼은 반응을 강화한다는 이른바 강화이론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행동을 많은 작은 구성요소로 분해해 각각을 계통적으로 강화한다는 생각에 따라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에 의하면, 사회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전적으로 강화에 의해서 형성된다. , 어떤 특정한 행동에 강화, 즉 보상이 주어질 때, 그 행동이 반복될 빈도는 높아진다는 원리다. 이는 당시대의 심리학 분야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 들어서 다양한 분야에 쓰였다. 예컨대 기업의 카운슬링이나 장려제도 같은 인사제도에도 교묘하게 활용되었다. 현재에도 기업에선 가장 매력적이며 유효한 직원 유인책으로 쓰이고 있다. 성과에 따른 보상이라! 다들 그것 때문에 저 죽는지 모르고 종착역까지 죽어라 달리는 것 아닌가!

 

스키너와 전혀 다른 접근을 한 제롬 브루너는 지각 현상을 세 가지 요소로 나누고 있다. 즉 준비된 상태, 환경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힘, 검증 이 세 가지가 그것이다. 그는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성분은 이전에는 인지되지 않았던 아이디어 사이의 관계와 유사성에 관한 규칙을 발견했을 때의 흥분감이며, 또 거기에 수반되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주장했다. 이상이 대충 정리한 현대 학습심리학의 골간이다.

 

오랫동안 진척을 거듭해 온 심리학 연구를 통해 생각해 보게 되는 게 있다. 그간 심리학자들은 개, 원숭이, 쥐 등을 대상으로 학습을 시켜보며 새로운 개념인 조건반사시행착오를 찾아냈으며, ‘과학적으로는 연구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 탐구하고, 놀라운 착상인 국부지도포괄지도마저 만들어 냈다. 관계와 유사성에 관한 규칙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학자들의 연구는 인간 사회에서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첫째, (개 앞에 놓인) 벨은 계속해서 울려대고, 먹이는 변함없이 오늘도 나오고 있는가? 아니면 개는 교활한 속임수에 놀아나고 있고, 이제는 그 속임수를 간파하기 시작했는가?

 

둘째, 상자를 벗어난 고양이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가? 다른 실패한 고양이들의 경우에는 어땠을까? 성공한 고양이는 자신이 성공한 방식을 다른 고양이들에게 가르쳐 주었을까? 아니면 혼자만 알고 그 같은 진실을 알리는데 무관심하거나, 뚝 시치미 떼고 말았을까?

 

셋째, 우리는 희망대로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모두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의사거나, 변호사거나, 재벌가 자녀로 태어나거나, 자수성가형으로 출세를 하거나 등등. 설사 그것이 무엇이었건 간에 그렇게 될 여지는 이 사회에서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이런 허풍장이의 말은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까?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지껄여대는 것처럼 극단적으로 개인으로 분리되어 혼자만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살면 다 이루어지게 되는 걸까? 우리는 이전에 자기 믿음과 존재를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인가?

 

넷째, 우리는 직장이든 어디에서든 인간에게 사육되며 바나나를 따오는 원숭이보다 훨씬 통찰력 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를 사육시키는 자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를 사육하는 자들을 사육하고픈 욕망은 없는가?

 

다섯째,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국부지도만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손엔 아직 펴보지 않은 포괄지도를 들고 있는가? 보편적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게 일부러 좁은 길만 제시하는 자들이 주변에 없는가? 수많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프로파겐다에 이끌린 것처럼 내가 판단한 것은 실은 저들이 내린 판단을 내 머릿속에 심어 놓은 것은 아닐까? 혹시 나는 이 같은 질문을 남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을 향해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여섯째, 어떤 특정한 생각과 행동을 강화해 대는 고용주, 정부, 미디어와 우리는 어떤 민낯으로 매일 만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브루너의 말처럼 검증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절차를 밟고 있기나 한가. 아니면 이런 골치 아픈 문제는 외면해 버리는가? 이런 것들이 심리학으로서 사회 문제 읽기의 예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심리학자들은 왜 이 같은 학습 연구에 인간을 동원하지 않고 동물을 쓴 것일까? 1차적으로 내릴 수 있는 답이라면, 심리학자들은 문제 해결에 무엇을 사용했는지 단순하고 기본적인 기능을 알고 싶어 하지만, 인간은 매우 복잡한 지적 장치를 갖추고 있어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해석하는 게 훨씬 더 어렵기 때문에 동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실제로도 인간은 자기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며, 솔직한 반응조차 극도로 자제한다. 다른 동물보다 주의력이 깊은 까닭에 오랜 시간 생존해 온 경험치가 반영된 것일 것이다.

 

이런 인간의 특성은 최근에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수없이 선거를 치러 왔지만 특정 후보를 왜 찍었는지도 모르고, 그 이유를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말이다.(이런 사람들일수록 극히 사소한 것에는 막대한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붓는다.)또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가 다 똑같다거나, ‘그래봐야 달라질 거 없다거나, ‘나한테는 아무 득도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냉소적 태도가 옮은 것인 양 자가 확신한다. 이런 자들은 사실과 자신의 믿음 사이에는 부합되지 않는 가교만이 놓여 있을 뿐인데도 이를 맹신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반응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은 스스로에게는 극히 바보처럼 행동하지만, 다른 누구 앞에서는 지나치게 똑똑하게 굴려 하기 때문이다. 세상엔 똑똑한 원숭이들이 넘쳐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앞으로도 더 학습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학습하는 과정도 함께 학습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럴 때 똑똑한 원숭이들은 헷갈리는 짓을 더는 하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2차적인 답으로 넘어가자면, (이건 좀 더 흥미로운 답이긴 한데,) 심리학자들이 학습 연구에 인간을 동원하지 않고 동물을 쓴 이유는 어떤 면에선 인간이야말로 동물과 별판 차이 없기 때문이다. 만국의 자본가들과 거짓 선동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는 조삼모사(朝三暮四). 이 말을 모르진 않을 테니 부연할 필요는 없겠고 결론만 얘기하자면, 이런 속임수는 사회 곳곳에서 - 여전히 먹힌다. 고용안정화니 비정규직 폐지니 하는 거짓 선동이 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들의 거짓말은 왜 대중에게 계속 먹히는 것일까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오늘만을 살기 때문이다. ‘내일을 기약하는 건 따라서 유토피아적일뿐이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자본가나 권력자들일수록 더욱 더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돼지고기 도시’가 만들어 낸 전혀 다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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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도시가 만들어 낸 전혀 다른 세상

 

미국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분업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도입된 때는 남북전쟁이 끝난 뒤였다. 이 제도는 식품 가공업에서 처음 나타났다. 식품 분야는 항상 정해진 작업이 명확한 순서에 의해 진행되고, 원료 또한 작업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다루기 쉽고 운반도 간편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분업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의 원리 하에 생산된 최종 제품은 통일된 규격으로 일정한 용기에 담겨져 다음 공장으로 운반되었다. 부대에 든 밀가루나 쇠고기 통조림처럼 말이다.

 

이 획기적인 방식을 처음으로 선보인 곳은 포코폴리스(‘돼지고기 도시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미국 전역에 알려진 오하이오 주의 남서부 도시인 신시내티에 소재한 어느 돼지고기 출하 공장이었다. 1850년대 이 공장에서는 이동 크레인 원리를 이용해 돈육을 가공했는데, 실려 온 돼지는 도살되자마자 가죽이 벗겨지고, 천정에 매달린 레일의 컨베이어에 늘어진 고리에 가서 척 걸렸다. 곧 식용 돼지는 작업원에서 작업원으로 즉각 이동되며 해체되었고 내장은 제거되고 세척되어 검사를 마친 후 스탬프가 찍혀서는 냉동 창고에 던져졌다. 여기에 걸린 시간은 놀랍게도 불과 35초였다.

 

이 작업 광경을 지켜본 사람 중에는 정원(庭園) 조성 기사도 있었다.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가 바로 그로, 그는 이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네 사람의 작업원 중 두 사람은 돼지를 들어 올리고 이리저리 돌리는 역할을 한다. 나머지 두 사람은 고기를 썰고 자르는 인간 기계로서 푸줏간의 칼을 무정한 톱니바퀴처럼 휘둘러 능률적으로 작업을 해치운다. 숙달된 솜씨로 돼지 다리, 어깨, 기타 각 부분을 자르고 다시 네모진 육편으로 썰어 삽시간에 운반차에 실어 제각기 목적지로 운반한다.”

 

한 마리의 돼지가 작업대 위에 올려 진 순간부터 다음 돼지가 올려 질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처음 잰 사람도 그였다. 이렇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가공하는데 쓰인 돈육 크레인은 다른 식품업계에 전파되었고, 그 결과 업계는 판매 가격을 자연스럽게 인하할 수 있게 되었다. 혁신적인 시스템이 새로운 시장 판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같은 시스템은 통조림 생산에도 그대로 따라갔다. 그리하여 1890년 미주리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조지 베스트는 통조림은 몇 년 전에는 고급 식품이었지만 지금은 가공되지 않은 음식보다 싸기 때문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다라고 단언할 정도가 된다.

 

한 산업에서 검증된 효과는 즉각적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이 시스템은 중공업 분야에 다시 파급되어 보다 체계적으로 작업원들의 활동을 관리해 나가는 데 쓰였다. 직공들은 인간의 스케줄이 아닌, 인류 최초로 기계의 스케줄에 맞춰 작업하게 되었다. 모든 불필요한 노력과 동작은 삭제되고, 보다 빠른 작업 방식만이 지속적으로 찾아졌다. 이런 급진적인 변화는 실은 과거에는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었다. 절대불변의 원칙이 한순간 깨져나간 것이다.

 

효율성을 향한 경쟁 원리는 급격히 다른 곳으로 확산되었다. 곧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총화를 주창하는 인사들이 등장해 보다 더 효율적인 방식을 제안했다. 그 중 한 사람이 테일러 시스템의 고안자 프레더릭 W.테일러였다. 그는 스톱워치를 든 채 베들레헴 스틸 회사의 모든 공정을 면밀히 관찰하고는 분석했다. 그 결과 석탄을 취급하는 작업에서 셔블(삽이나 용기)하나에 9.5킬로그램의 석탄이 담겨질 때 가장 작업능률이 높다는 점을 찾아내고는 회사의 모든 공원들에게 그 무게의 셔블을 사용하도록 했다. 또 프랭크 B. 길브레드와 릴리언 M. 길브레드 부처도 외과의사, 야구선수, 벽돌공 등을 대상으로 작업 중의 인간 구조, , 치수 등을 연구하여 가장 효과적인 작업 운동 방식을 찾아냈다. 그들은 실험대상자의 손에 광원(光源)을 달고 촬영한 사진에 나타난 빛의 이동을 바탕으로 철사줄 모형을 만들어, 실험대상자들이 자신의 운동을 연구하여 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했다. 벽돌공의 경우에는 벽돌을 집어 올릴 때마다 허리를 구부리는 것을 발견하고 편한 자세로 벽돌을 집을 수 있도록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작업대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자 하루에 1000개의 벽돌을 쌓던 벽돌공은 2700개나 쌓을 수 있게 되었다. 고용자들은 이 같은 획기적인 생산 증대 방식에 열광했다. 이것은 대량생산 시대를 예고한 것이었다. 동시에 많이 만들면 싸진다는 신화가 고용자들 머릿속에 각인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검증된 시스템은 사람과 산업과 세상이 움직이는 방향을 완전히 고정시켜 버렸다. 또한 모든 분야에서 일은 일방향성을 띠며 움직였다. 효율성을 향한 질주는 실용주의를 내세운 미국 사회에서 더욱 각광을 받았다. 곧이어 하나의 생산방식을 넘어 이제는 체제를 구축하는 보다 진보된 체계로 진척되어 갔다. 그 결정판이 그로부터 50~60년 후 마침내 현대 대량생산 기술의 비조(鼻祖)라 할 헨리 포드와 T형 자동차 공장이 등장한 것이다.

1850년대 이 미국발 열풍이 역사상 초유의 일만은 아니었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그보다 88년이나 앞선 1762년에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교를 가설한 엔지니어 장 로돌프 페로네는 그 해에 래글에 있는 어느 평범한 놋쇠 핀을 만드는 공장의 모든 생산 절차를 분석해 냈다. 역사상 최초의 공업 분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노동 분담을 세밀히 조사했고, 작업 중인 노동자의 시간과 작업을 근대적 연구방법으로 면밀하게 분석했다. 핀대가리 제작 공정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한 사람이 1분간 20개의 핀 대가리를 굵은 것이든 가는 것이든 때려댈 수 있다. 핀 대가리 1개당 5~6회씩 때리므로 모루는 매분 100~120회의 타격을 받는 셈이다. 한 사람이 보통 한 시간에 1000개분, 따라서 하루에 1~12000개분의 핀 제조 준비를 하게 된다.”

 

이런 관찰은 통찰력이 번뜩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아담 스미스가국부론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패로네도 그대로 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각각 독립하여 작업을 하는 열 사람의 미숙련공은 각자 하루 한 개, 즉 전부 10개의 핀을 만들기 어렵지만, 열 사람이 한 조가 되어 한 공장에서 일을 분담하여 작업하면 48000개 이상의 핀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이미 이때 착안되었던 것이다. 이에 자본가이면서 고용주들은 또 다시 생산 증대 방안에 폭발적으로 열광했다.

그렇다면 이런 획기적인 공정은 이때가 처음이었을까? 그보다 오래 전에 생산을 획기적으로 올리려는 착상이 있었다. 르네상스 인간의 전형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이 고안해낸 바늘 연마기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공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

 

“159612일 이른 아침, 나는 다음과 같이 시산(試算)해 보았다. 한 시간에 400개의 100배가 되는 바늘을 처리할 수 있다면 매시 4만개, 12시간이면 48만개를 처리할 수 있다. 만약 1000개에 5솔리드의 대금을 받는다면 400만개라면 2만 솔리드가 된다. 하루 일하는 몫이 1000리라라면 한 달에 20일을 일해서 1년이면 금화로 6만 더컷을 얻게 될 것이다.”

 

다빈치식 생각은 그 후 영국의 목사 윌리엄 리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그는 놀랍게도 16세기 말 매분마다 1000~1500코를 뜰 수 있는 편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손으로 뜨면 아무리 빠른 사람일지라도 매분 100코 정도가 고작일 때 이 기계는 몇 대에 걸쳐서 이어졌던 편물공들의 직업을 위협하며 바야흐로 기계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생산성 향상과 연계되어 이를 가속화 한 개념에는 또 다른 예가 있다. 바로 부품이다. 부품이라는 생각은 생산 효율성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도 가져왔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동일한 규격의 부품은 호환성을 가져오며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의 제2요소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오늘날에도 강력한 하나의 생산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부품컨셉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말이었다. 1785, 프랑스의 총포공이었던 르블랑은 작업 과정을 견학하러 온 당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토머스 제퍼슨에게 50자루분의 규격화된 소총 방아쇠 부품들을 분류하여 늘어놓고는 그 중에서 아무 부품이나 골라 맞추면 방아쇠가 조립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퍼슨은 그 말대로 부품을 끼워 맞춰 방아쇠를 당겨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가 부품이 만들어 내는 이 획기적인 생산방식과 새로운 세계에 얼마나 놀랐는지는 본국에 있는 국무장관 존 제이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소총 제작에 관해 이곳 프랑스에서는 대단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의회에서도 흥미를 느낄 만한 일이며, 알아둘 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라고 생각한다. 그 제조방법은 우선 완전히 동일한 부품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면 부품은 다른 총에도 사용할 수 있다. 르블랑은 자신이 고안한 장치를 사용하여 그 일을 해내고 있으며, 이는 작업 과정을 단축하므로 소총을 보다 싼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상을 했지만, 르블랑은 자신의 후원자를 찾는 데 실패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사람들의 관념 세계에 부품아이디어는 너무나 혁신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상품을 생산하는데 부품을 사용해 교환 가능하게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그런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달랐다. 신생 미국은 이 부품 원리가 지닌 가치를 재빠르게 눈치 채고는 생산 원리에 적용했다. 그 까닭은 부품 생산 아이디어는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고, 신생 미국으로서는 그 같은 욕구가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고의 차이가 유럽과 북미의 판도를 이후 완전히 바꿔 버렸다.

 

 

 

 

 

                  ()                                   (나)                         ()

() 20세기 이후 세계 공장의 대부분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는 포드식 이동 조립라인은 신시내티 돼지고기 출하 공장에서 고기를 절단하고 포장하는 조립 라인 운영 방식에서 핵심적인 아이디어가 얻어진 것이다. 19C에 미국인들의 왕성한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육을 처리해 대량 출하하는 전 과정에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착안되었고, 엄청난 생산 증대를 가져왔다. 위 그림은 돼지가 매달려서 이동하는 동안에 내장이 제거되고 세척되는 모습이다. 1850년에 돼지고기 출하업은 이미 큰 사업이었다. 1873하퍼즈 위클리지에 이 그림이 게재되었을 때, 당시 발전된 공장에서는 하루 평균 1500마리의 돼지를 처리하는 데에 150명이 종사하였고, 전국 연간 출하량은 약550만 마리에 달했다. () 대량생산에 필수적인 컨베이어벨트의 최초 적용 예는 수송 띠로 1890년 철도용 브레이크에 쓰이는 소형 주물을 제조하였던 피츠버그의 웨스팅하우스 주물공장에서 사용되었다. 당시 잡지에 게재되었던 목판화 속 띠는 연속되는 평면을 만들기 위해 서로 연결된 테이블을 써서 바퀴 위에 재료를 올려놓고 주조, 주형, 기타 각 부문을 통과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포드는 이 주물 공장의 작업 방식을 포드 시스템으로 끌어왔다. 이것은 포드가 모든 산업지식을 끌어 모아 새로운 산업 방식을 창안해 낸 것을 뜻한다. () 포드 생산 공정의 최종 단계는 공장 밖에 자리 잡았다. 이 점은 추론컨대, 그가 의도하였던 자본주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예측케 한다. Source: Images from Time-Life collections.

 

오늘날 전 세계 공장에서 작동되고 있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역사적인 1913년 하일랜드 파크의 헨리 포드 자동차공장에서 시현된 것이다. ‘주물의 찰리라고 불렸던 찰스 E.소렌슨과 그 밖의 생산 분야 사람들의 협력으로 포드는 마침내 이 혁신적인 방식을 현대 시스템으로 완성해 낼 수 있었고, ‘자동차의 마법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가 만든 T형 자동차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규격이 통일되고 교환 가능한 5000여개의 부품으로 조립된 검정 단색의 자동차였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를 생산하고, 생산 라인을 컨베이어벨트로 자동화 한 선구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진면목은 다른 데 있다. 자동차 보다 더 큰 세계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혁신적인 시스템을 운영한지 얼마 안 되어 시스템 운영 제1원칙을 세웠다.

 

작업에 사람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작업을 할당한다.”

 

이것은 포드 자동차 생산라인의 제1원칙이면서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를 가속케 한 제1원칙이었다. 바야흐로 인간이 노동을 지배하던 시대에서, 노동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로 급전환된 것이다.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포드 이전에 사람들이 가졌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서 일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가져 다 줄 것인가?’하는 식으로 문제를 뒤집어 보는 참신한 발상이 포드의 일관 작업(assembly line)’을 가져온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방식 전환이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을 가져온 면은 있지만 그 후 인간을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게 만든 면도 아울러 지적해야만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이 바뀐 이상, 사람들의 인식, 사상, 정치·경제, 문화 및 행동 양태 등 모든 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완전한 시스템의 전환, 바로 그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포드는 테일러나 길브레드 같은 초기 선구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두 가지 능률적인 공정 기초를 확립해 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노동자에게 한 단계 이상의 작업은 시키지 않는다였다. 한 사람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작업을 맡아 하는 방식은 폐기되고, 전 공정은 29개 작업 단계로 쪼개졌다. 그러자 한 개의 자석발전기를 만드는데 20분이 소요되던 것이 이제는 자동차 조립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1310초로 줄어들었다.

 

두 번째 요소는 노동자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자세를 되도록 취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조립 부품이 지나가는 벨트의 높이를 20센티미터 가량 높인 것은 작업 소요시간을 7분으로 단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벨트 이동 속도를 조정해 작업 속도를 5분 이내로 단축하게 했다. 새시 조립 작업은 이 두 가지 방식을 결합한 것이다. 한 군데에 놓아둔 채 작업 하면 12시간 28분이 걸리던 것이 새시를 허리 높이로 올려놓고 적절한 속도로 조립공 사이를 기계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조립 시간은 1시간 33분까지 줄어들었다. 더불어 벨트 작동 시간도 엄격히 관리해 45개의 부문을 매분 1.8미터의 속도로 통과하도록 조정했다. 그는 이런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공원은 4개의 흙받이를 새시 틀에 부착한다. 모터는 10번째의 작업에서 다루어진다. 부품을 집어 놓기만 하고 조립은 하지 않는 작업원도 있다. 볼트는 끼우지만 너트를 끼우지 않는 공원도 있으며, 너트는 끼우지만 그것을 조이지 않는 공원도 있다. 34번째 작업 단계에서는 거의 모습이 갖추어진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는다. 그리고 45번째의 작업 단계를 거치고 나면, 자동차는 거리로 달려 나가게끔 되어 있다.”

 

이처럼 혁신적인 포드 방식으로 길거리로 뛰쳐나온 자동차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1911~1912년 사이 78400대였던 생산 대수는 1916~1917년에는 785432대로 급증했다. 그에 따라 T형 차의 가격도 690달러에서 360달러로 47퍼센트나 인하되었다. 이 수치 하나만으로도 당시 포드와 새로운 자동차 수요자들이 이 방식을 얼마나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다. 누구도 이 방식에 문제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방식은 자동차 생산 방식을 넘어 점차 모든 산업과 미국 사회를 지배했고, 지난 세기와 금세기 세계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주요 원리가 되었다. 그것은 어떤 사상이나 그 사상과 결부된 체제 이상의 이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나아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체제를 이뤄낸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세상에 열광했고, 그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두 가지, 즉 생각의 지평을 확장시켜보자.

 

하나는 1913년경 포드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드가 만들어 낸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것이다. 1913년 당시, 이 경이로운 맹활약을 펼친 포드 자동차의 생산 공정에서 최종 단계가 수행된 곳은 뜻밖에도 공장 밖이었다.

 

포드는 왜 마지막 단계를 공장 밖에 두도록 설계한 것일까? 그것은 외견상 자동차 출하를 염두에 둔 것임은 누구나 짐작하는 바일 것이다. 사진()에서처럼 경사판을 미끄러져 내려간 T형 자동차 차체는 아래쪽에서 나오는 완성된 새시 위로 떨어졌고, 곧바로 조립되어 출하될 수 있게 고안되었다.

 

포드가 공장 밖에 최종 단계를 둔 것은 이제 막 출하되어 나오는 자동차를 사람들이 직접 보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세기의 생산물을 쉴 새 없이 보게 함으로써 소비 욕망을 자극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철저히 의도된 마케팅 일환이었다. 그렇다면 그게 다 일까? 여기엔 보다 근본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이미 생산 방식을 넘어 사회 체제이자,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 포디즘(Fordism)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수용하도록 암묵적으로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 자동차를 타기 싫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만드는 풍요로운 체제를 거부하는 거요.”

 

일테면 이런 식의 저항할 수 없는 하나의 공고화된 이념을 만들어 내고 이를 프로파겐다 한 것이다. 이 같은 발상은 20세기에서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적지 않은 자본주의 여정 동안 포디즘이 함의하고 있는 모든 성과와 그 이면의 모든 것들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갈등의 근간이 되고 있다. 지구상 대부분 인간들이 하나의 부품으로써 자기 앞에 밀려오는 수많은 부품들을 다루기 위해 매일같이 컨베이어벨트 앞에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세운 체제의 부품이 되어 버린 지 이미 100년이 넘었다. 일에 다가갈 수 있는 선택상의 자유는 박탈당하고, 일이 내게 던져진 순간부터 이 역전된 기현상은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무엇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세우고자 한다면, 공장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제대로 간파할 줄 알아야 하고, 모순 자체를 각성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장 밖에 서성이는 자들은 헨리 포드와 그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소비자들, 실업자들, 세리(稅吏), 허리 휜 가장의 임금을 기다리는 초조한 서민 등 모든 자들이 있다. 포드를 옹호하려는 자들 밖에서 한 끼의 밥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이 시스템에 대한 점검에의 의지다. 100년은 검증의 시간으론 이미 충분하다. 우리는 보다 나은 시스템에 대해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날씨를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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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를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

 

날씨를 잡는 자가 천하를 잡는다.”

 

지구 온난화로 기후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게 증폭된 곳은 기상청보다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라 일컬어지는 미국 월가(). 기후기상은 선물(先物)같은 금융상품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월가의 JP모건 체이스, 골드만삭스, 버클레이 캐피탈 등 대형 투자사들은 기상전문가를 채용해 날씨관련 상품을 이미 만들어 냈다. 이 파생 상품은 1999년 미국 시카코 상품거래소에서 처음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이래 10개 도시의 기온지수에 대한 선물옵션이 상장되었고, 곧이어 유럽과 일본 등지로 확대되어 현재는 시장규모가 근 32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파생 상품을 취급하는 금융회사의 위험을 관리해 주는 회사도 생겨날 만큼 이 시장은 지난 10년간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 왔다.

 

월가가 일기예보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날씨야말로 글로벌 경제를 지배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월가의 눈으로 보는 날씨는 우리가 보는 것과 달리 예보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수 조 달러에 달하는 소비자 상품 시장의 향방이 날씨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전 세계 곡물 생산량과 풍흉 상태, 혹은 전력 수요예측 등은 날씨와 밀접히 관련 있다. 또 기상에 따라 미국 플로리다 산()오렌지가 흉작이 되거나, 아이오아 산 옥수수가 평년작 수준을 밑돌지 미리 내다 볼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목화 작황이 어떨지도 예상해 볼 수 있다. 물론 과테말라의 바나나 수확 상태로 미국 도심에 있는 레스토랑의 식자재 가격의 변동폭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내일의 날씨를 정확히 안다면 선물 시장에서 수많은 투자자들보다 훨씬 큰 이익을 낼 수도 있다. 심지어 해당국의 정치경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자신의 원하는 정권을 현지에 다른 루트를 통해 개입하게 할 수도 있다. 미국 금융권은 그렇게 오랫동안 중동,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의 국내 정치에 간여해 왔다.

 

날씨 상품은 2010년까지는 월가의 마지막 수익원으로 여겨졌고, 그 기대는 근 15년 동안 충족되어 왔다. 처음엔 강우량과 기온도 파생 상품이었으나 차차 적설량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최초의 사업은 적설량의 많고 적음을 두고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를 매칭시켜 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모델이었다. 그러나 2010년 미국에서는 예상에 못 미친 적설량과 예년과 다른 따뜻한 겨울 기온으로 날씨 상품을 만들어 낸 은행, 금융브로커, 보험회사들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하지만 정작 고객들은 별 재미를 못 보면서 시들해졌다. 날씨 파생 상품에 손댄 투자자들이 손해를 입자 월가는 상품을 바꿔 눈 보험의 경우 폭설시 예전처럼 몇 인치가 내리면 보상을 한다는 식에서 다양한 조건을 결합시키는 쪽으로 바꿨다.

 

이 시장에 미국만이 독주하고 있진 않다. 영국의 기상정보 시장도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급성장해 지금은 유럽에서 가장 큰 시장이 되었다. 날씨 보험은 미리 정해진 강수 구간별로 해당 강우 현상이 발생할 경우, 미리 약정한 금액을 환불해 주는 식이다. 또 강풍, 안개, 낮은 구름, 폭설, 악천후 등으로 각종 옥외행사에서 손해를 입게 될 때에는 손해액에 해당하는 만큼 환불해 주는 보험도 있다. 요즘에는 소비자 행태와 연계해 여타 상품 구매와 연동하는 서비스까지 개발 중이다.

날씨 관련 금융 상품의 등장은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대형 기상이변이 주요인이다. 세계적으로는 대형 기상이변 발생 빈도도 계속 늘고 있다. 1980년대에 연평균 12.7회 발생하던 대형기상 이변은 2010년대에는 24.5회로 거의 2배가량 증가했다. 세계적인 독일의 재보험 회사 뮌헨레 그룹 조사에 의하면, 1950년부터 2008년까지의 대규모 자연재해는 1950년대에 449억 달러 수준이던 것이 해마다 증가해 1960년대에는 805억 달러, 1970년대에는 1476억 달러, 1980년대에는 2280억 달러로 증가했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그 피해액이 1950년대에 비교해 무려 약 16배인 7천여억 달러로 증가됐다. 지구온난화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증거다. 지구 평균기온이 2도 상승하면 지구상 생물종의 약 20~30퍼센트가 멸종한다. 저위도 지역은 직격탄을 맞아 작물 수확량은 감소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아가 발생하며, 온갖 사회적정치적 불안요인이 겹쳐진다. 만약 지구 기온을 4도 높이면 어떻게 될까? 세계 인구의 20퍼센트가 물 부족 현상에 시달린다

 

이 같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당연히 온실가스다. 1980년대에만 굴뚝과 연소기관으로부터 연간 160억 톤 이상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었다. 이 수치는 계속 늘어 나 2030년경에는 4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메탄가스, 일산화질소가스, 염화불화탄소 같은 활성 화학물질이 상시적으로 누출돼 대기 오염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 물질들은 대기 속 농도를 높여 우주공간에 방산되어야 할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지구 표면을 뒤덮으면서 평균 지표 온도를 약 4~7도 정도 올릴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극지의 빙관이나 부빙원(浮氷原)은 급격히 녹고 있다. 해수면도 놀라운 수준으로 상승하고 있다. 몇 만 년 만의 안정 상태가 깨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지구에서는 최악의 상황인 극지방의 빙하가 다 녹아 버리게 된다. 그야말로 기후변화가 인류 생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한반도도 지구온난화의 예외 지역은 아니다. 지난 100년간 평균기온이 1.5도나 올라갔다. 이는 지구 평균 상승치의 2배나 된다. 제주도의 해수면은 최근 40년간 세계 평균의 3배에 이르는 연평균 5.5밀리미터나 상승했다. 경제적 타격도 심각해 기온이 4도 올라가면 GDP5.6퍼센트가 손실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야말로 심각한 수준이다.

 

기후변화는 나비효과마저 불러오고 있다. 예를 들어 인도의 우기인 6~9월 강우량이 크게 줄면 이로 인해 전력 소비량 증가로 정전 사태가 발생하고, 이는 인도의 국가신용등급 하락의 원인이 된다. 우리의 경우엔 어떨까? 비가 안 오면 에너지 가격은 상승하고, 이는 전기요금 인상논의를 부채질해 공기업의 비효율성이 도마 위에 오른다. 이때면 알짜배기 공기업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세력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민영화를 부르짖는다. 그 결과 노조원들은 민영화 반대 파업을 벌이고, 그 여파로 경제가 일정 부문에서 영향을 받으면 수익성 저하를 핑계로 기업들은 고용 불안정을 호소하며 차기년도 채용 규모를 줄이거나 구조 조정을 선언하고 해직자를 양산해 내고, 그 결과 청년 실업은 더욱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게 된다. 철도, 공항 운영 등 모든 면에서 특정 집단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철 지난 민영화 구호를 여전히 외쳐대고 있는 건 이런 엄청난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날씨를 빌미삼아 월가와 다른 방식으로 국가 기간산업을 통째로 삼키려는 음모를 획책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상이변은 국내외 경제 패러다임까지 바꿔놓게 된다.

 

기상은 전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날씨는 전력이나 가스 구매 등 생필품 구매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항공운수부문은 운항 패턴의 최적화를 결정하는데 주요인이 된다. 관광레저부문은 창 밖의 날씨에 가장 영향을 받는 분야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미세 황사가 몰려오면 반도체 산업은 생산 공정상 불량률이 늘게 되어 청정 환경 유지를 위한 시설투자나 비용 투여로 결국 생산비가 증가되는 영향을 받는다. 건설업도 날씨에 따라 천연가스 수요를 예측하고 이를 배관망 현장에 적용하거나, 시공 시 외벽 공사 기일을 변경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도로관리공단에서는 동계 적설량을 예측해 추가 제설비용을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대응은 어디까지나 예측에 근거한 것이다

 

세계적 기상센터인 미국립기상연구소(NCAR, National Center for Atmospheric Research)에 의하면, 기상변화는 세계 경제의 80퍼센트에 직·간접 영향을 미친다. 일상적 날씨만으로도 미국경제는 약 4850억 달러에 달하는 영향을 받는다. 기후에 민감한 분야가 GDP에 미치는 영향도 대략 40퍼센트에 달한다. 매년 기상재해 피해액이 약 2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22조원에 이른다. 우리의 경우엔 냉해, 여름철 폭염, 폭설 등으로 기상재해 손실액이 지난 7년간(2000~2007)합산 19조원에 육박했다. 이는 90년대보다 3배나 증가한 수치다. 당연히 날씨는 소비자 물가 상승 요인의 주범이 되고 국민경제에 부담이 된다.

 

기상이변에 대한 대책은 어제 오늘만의 관심사는 아니다. 1980년대부터 전 지구적으로 인간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하기 위해 이른바 웅장한 계획이란 걸 기획하기도 했다. 이 계획은 돌이켜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공상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미국 국립대기조사 센터의 필립 톰슨과 과학칼럼리스트 로버트 오브라이언이 소개하는 그 무렵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몇 가지 계획이란 걸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극의 얼음을 탄소로 까맣게 칠하면 반사로 인한 태양에너지 상실이 적어져서 북쪽의 황무지는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넓은 지역에 걸쳐 해양의 표면을 헥사데카놀 같은 화학약품으로 덮어 증발을 적게 만들면 그것이 물을 봉쇄해 증발을 적게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떤 지방의 비를 적게 하고 열대의 폭풍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북극양 수면 밑에 10개의 깨끗한’ 10메가톤의 수소폭탄을 폭발시켜 북극의 상공에 두께 8킬로미터의 얼음 결정으로 된 구름을 만들면 폭발에서 생긴 증기운이 대기 속으로 올라가 물방울이 되어 응결함으로써 그 결과 얼음의 결정운은 적외선이 우주로 날아가는 것을 막고 대기에 열을 가해 대기 대순환에 변화를 주어 전 세계의 기후를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88킬로미터의 베링 해협에 댐을 만들어 차가운 북극양의 물이 태평양에 들어가게 하면 대서양의 따뜻한 물이 차가운 물과 대체되어 북극지방의 기상을 1년 내내 좋게 만들 것이다.

 

이런 거창한 계획 말고도 좀 더 소규모적으로 기상을 바꾸는 계획도 세워졌다. 그 중 하나가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폭파시켜 골짜기를 만들고 습기 찬 태평양 공기를 자유로이 통과시켜 불모의 네바다 사막에 꽃을 피우게 한다는 것이다. 또 남()캘리포니아 해안 난바다의 30미터 깊이 수중에 세로 160킬로미터, 가로 320킬로미터 폴리에틸렌 판자를 가라앉혀 로스앤젤레스의 스모그를 없앤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계획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더 자세히 다룰 필요도 없겠다. 북극에서부터 북위 65도로 뻗은 지역 위에 탄소를 0.1밀리미터의 두께로 까는 작업에는 약 14억 톤의 탄소진이 필요하고, 수송기로 9톤씩 운반한다면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만 15000만 번이나 비행해야 한다. 효과나 경제성 모두 의문시 된다. 특히 베링 해협에 댐을 만들려는 아이디어는 1959년에 소련의 어떤 기술자가 제안한 것인데, 북극 지방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면 당장 소련의 강우가 줄어들어 경제를 파괴하게 될 거라는 주장과 대규모 겨울 폭풍으로 새로운 빙하가 생겨나 빙하시대에 직면하게 된다는 엇갈린 주장이 맞서기도 했다.

 

이처럼 기후를 변경시키려는 시도는 여러 면에서 상상되었으나, 어쩌면 애당초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후 변경은 쉽지 않지만, 일기예보를 통해 이상 기후의 피해를 줄일 수는 있다. 인간의 영역은 여기까지다.

 

기상 이변은 국제적으로 심각한 문제지만,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건너야할 두터운 장애물이 놓여 있다. 기후 변화는 한번 발생하고 나면 되돌기 어려운 불가역적 특성을 지닌다. 지구상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불확실성과 함께 공공재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 주인이 없기에 누구도 관리에 소홀해 쉽게 소진되고 망가진다는 이론.)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를 조정할 전 지구적 단일 정부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선진국들은 경제성장의 효익을 누리며 지구 온난화의 주범을 자임해 왔으나, 이제는 그 책임을 신흥국들에게 덮어 씌워 이산화탄소 배출권 제약 등 성장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철저한 자국 이기주의라는 국제 정치의 본질을 그대로 투영해 내고 있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은 대홍수가 나면 방주에 태우게 될 동물 표본을 정리해 놓고 있다. 여기엔 2280종의 동물 카테고리가 포함되어 있다. 별로 유쾌할 것 없는 점은 나나 당신의 이름이 이 장부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극히 명확하다. 지구를 구하는 일에 뛰어드는 것이다. 날씨를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자들도 있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이 행성을 무참히 더럽히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작은 노력은 1980년대식 웅장한 계획보다 훨씬 낫고, 90년대 이후 흥행에 성공한 월가의 기후 상품보다도 더 낫다. 더럽히고,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자들과 국가가 있는데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묻지는 말아 주시라. 우리에겐 너무나 뚜렷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이유가 있다. 어떤 자들은 흐린 날씨에 더 관심이 많을 테지만, 우리는 대부분 지구인들처럼 갠 날씨를 훨씬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태양이 뜨고, 초목이 푸른 걸 환영해야 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장영실, 조선의 과학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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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일의 경영리더십-잃어버린 성장 동력, 해법은 우리 내부에 있다 

역사에서 찾은 창조혁신 

 
성장 정체기에 직면한 글로벌 경제의 화두는 ‘신성장 동력’ 찾기다. 이에 우리 역사가 얼마든지 경영자산이 될 수 있다며, 우리 역사를 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에 집중했던 조선의 세종시대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국립 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자격루는 600여 년이 지난 2007년에 복원돼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첨단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 중앙포토
오천년의 우리 역사 자산은 얼마든지 우리 경영자산으로 바뀔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세종시대다. 광휘의 불꽃으로 타오른 600여 년 전 세종대왕 시대를 주목하는 건 위대한 벤치마크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 어떤 점이 오늘날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세종대왕이 태어난 1397년, 이 시기는 1368년 중국에서 명이 건국하고 28년이 지난 때로 조선건국 후 5년이 지난 해였다. 원(元) 제국 하에서의 세계 질서 속에서 강력한 문명 교류가 일어났으나, 대륙 패권이 명으로 교체되면서 세계 질서 속 마땅한 승계자 없이 흘러가는 상황이었다. 세종은 이 시기에 거대한 인류사적 과학기술을 접하게 된다.

과학기술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자격루(自擊漏) 개발이 이를 잘 말해준다. 물시계인 자격루는 중국 송·원 시대 자동 물시계의 기계장치에 한국의 전통 기술을 더하고, 다시 이슬람의 자동 시보장치 원리를 결합해 만든 것이다. 당대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시계인 셈이다. 세종 시대에 자격루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슬람의 역법과 질학(質學) 등 장구한 인류사적 과학 전통이 조선의 자산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술의 힘을 인류사적 가치로 알아보고, 이를 국운 융성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원동력은 세상에 대한 인식과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만들어진다. 가치를 찾아내고, 혁신을 일으킴으로써 국가적 경쟁력을 한껏 드높인 것이다.

글로벌 기술의 결정체인 자격루

자격루의 작동 원리를 살펴보면 글로벌 기술이 어떻게 올곧이 담아냈는지 알 수 있다.

첫째, 공이 굴러떨어지면서 시간을 알리는 장치는 13세기 아랍 세계의 과학자 이름을 딴 ‘알 자자리 제3·제4 물시계의 원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둘째, 수수호(물받이 통)의 방목(方木) 장치는 ‘알 자자리의 제7시계의 원리’에서 가져왔다. 셋째, 공을 이용한 인형 작동장치 중 핵심장치인 숟가락 기구는 비잔틴의 필론(Philon)과 헤론(Heron)의 자동 장치에서 착안했다. 넷째, 부력에 의해 부전(浮箭)이 떠오르며 발생한 수직 이동 간격으로 만들어진 1차 신호, 공의 낙하 운동과 지렛대의 움직임이 격발로 증폭돼 시보장치를 작동시켜 2차 신호까지 얻을 수 있는 장치는 장영실이 개발했다. 다섯째, 인형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점핑 잭(Jumping jack) 방식도 장영실이 개발해 낸 우리만의 독특한 장치다. 글로벌 기술이 총집결돼야 자격루가 완성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전 지구적 기술의 통합이 이루어진 셈이다. 세종은 이 거대 프로젝트가 얼마나 뜻깊었는지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의 김빈(金鑌)으로 하여금 편찬하게 한『보루각명병서(報漏閣銘幷序)』에 넘치는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거룩할 사, 이 제도는 하늘에 따라 법을 만드는 것이니, 천지조화가 짝지어진 범위(範圍)가 틀림없네. 적은 시각 아껴 써서 모든 공적이 빛났도다.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이 스스로 감화하여 어기지 아니하네. 표준을 세우고서 무궁토록 보이도다.” (세종 16년 7월 1일)

자격루가 매우 정밀할뿐더러 이를 통해 표준 시각을 세웠다는 얘기다. 자격루는 외국 사신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국가 기밀시설이었다. 기술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사 같은 톱니 원리를 당시에 썼더라면 그 응용 범위가 훨씬 넓어졌으리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톱니야말로 이후 인류 역사상 최고의 동력 장치이자, 발명 후원형기술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시간에 주목한 세종의 창조경영

그렇다면 조선의 물시계는 어디에 원형을 두었던 것일까? 고대 그리스의 물시계다. 그리스 물시계는 급수 실린더가 있고, 부표가 있는 등 자격루와 매우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톱니바퀴와 탈진기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 탈진기는 1088년에 중국 관리 소송(蘇頌)이 만들었다. 중국 기술이 서양과 만난 후 이것이 다시 조선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자격루는 이처럼 동서고금의 모든 시계 원리 및 기술이 융합됐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세종은 왜 이 거대한 물시계를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천년을 헤아리는 것도 한 시각이 어긋나지 않는 데서 비롯되고, 모든 빛나는 치적도 짧은 시간을 아껴 쓴 데서 비롯되었다”는 세종의 정치에 임하는 자세에 근거한다. 즉 세종은 국가경영자로서 국왕의 정치란 시간과의 싸움이자, 자신의 역사적인 시간을 잘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는 얘기다.

‘조선은 지금 몇 시를 살고 있는가? 국가 통치자로서 나의 시간은 몇 시인가?’

왕조 시대, 하늘의 시간을 받아 백성들에게 알리는 것은 황제나 국왕의 의무로 이를 관상수시(觀象授時)라고 한다. 때를 받아 백성에게 알린다는 뜻이다. 그 ‘때’라는 의미에 경영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자신이 통치한 시기를 제대로 관리하고, 융성시키고자 하였던 세종의 우주적 고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세종은 창조적 역사(役事)의 구현을 위해 혁신의 원천을 찾았고, 그 원천을 국가통치에 이용해 경영의 차원을 달리하고자 했다. 그것이 세종시대 창조 경영의 방법론이었다. 세종식 경영의 진수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외부의 것을 끌어오는 ‘내발(內發)’을 통해 최초로 발의하는 ‘초발(初發) 혁신’을 만들어 내고, 이를 다시 세계사적 유산으로 만드는 ‘외발(外發) 혁신’으로 원천과 응용이 어우러지게 해 전 지구적 차원의 문명사를 주도하는 데 있다. 창조의 원류는 이슬람의 유산이었으나이를 독창적으로 조선에 맞게 승화시킨 것이다.

최근 글로벌 기업의 도전으로 국내 기업들의 성장 동력이 약화돼 곳곳에서 창조·혁신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하지만 해법은 우리 내부에 있다. 우리 역사에서 벌어진 위대한 창조·혁신 사례에서 보듯 인식의 문을 확장하고, 글로벌 차원으로 실험하면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 경영자들은 변화의 바람이 몰고 온 시대와 자신이 처한 시간을 남다른 눈으로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모른다면 경영의 현주소는 알 수 없다. 그 반대라면 우리 경영자들도 세종시대처럼 광휘의 경영 세계를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전경일 - 인문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인문과 다른 분야의 경계를 허무는 통섭적 관점을 연구한다. 저서로『 조선남자1,2』와『 이끌림의 인문학』 등이 있다.

출처: http://jmagazine.joins.com/forbes/view/309187 


자신과 세상을 변혁시킨 책 떨이와 책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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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세상을 변혁시킨 책 떨이와 책 쓰기

 

흔히 독서를 하면 상상력이 높아진다고 한다. 당연히 일리 있는 얘기다. 하지만 독서가 주는 진정한 힘은 그보다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반추와 각성을 통해 통찰의 힘을 얻게 한다. 나는 이걸 가리켜 반각통(反覺通)추성찰(芻醒察)의 세계라고 부른다. 기존의 사고관념에 반()하여 깨달음을 얻고, 이치를 되짚어 봄으로써 어리석음을 깨뜨려, 자신과 세상의 진면목을 살피게 한다. 맹자가 말한 깊이 파고들어 스스로 터득하는 경지(深造自得之境)가 바로 이것이다. 선인들이 책을 많이 읽거나[多讀], 많이 생각하거나[多商量], 많이 쓰는[多作]이른바 삼다(三多)를 최고의 학문 정진 방안으로 제시한 것은 폭넓은 인식관세계관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세 개는 서로 통하며 한 묶음이 된다

 

중국 남송 시대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 중에 구양수(歐陽脩, 1007~1072)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의 독서법도 이런 것이다. 너무 가난해 모래 위에 갈대로 글쓰기를 했다는 그는 삼다일통(三多一統)을 통해 최고의 문인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불과 열아홉 살 나이에 퇴계 이황도 성리학적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데 그를 이끈 것도 책을 통한 각성이었다. 퇴계집》〈도산잡영(陶山雜詠)에 실린 글은 퇴계의 수련의 이면을 엿보게 해준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삼가 마음을 잡고 이치를 궁구할 때, 간간히 마음에 얻는 것이 있으면 흐뭇하여 밥 먹기도 잊어버린다. 정작 하다가 통하지 못한 것이 일을 때에는 좋은 벗을 찾아 물어 보며, 그래도 알지 못할 때에는 혼자서 분비(憤悱)한다. 그러나 감히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고 우선 한 쪽에 밀쳐 두었다가, 가끔 다시 그 문제를 끄집어내어 마음에 어떤 사념도 없애고 곰곰 생각하면서 스스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을 때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법열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선생의 고백은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이전에는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찬연한 고백을 남기고 있다. 책읽기의 즐거움은 선생이 읊은 시 한 편을 감상하는 것으로도 충족하다.책 읽기는 산 유람과 같다(讀書如遊山)에서 보여주는 책 속의 또 다른 경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책 읽기는 산 유람과 같다 했는데(讀書人說遊山似)

나이 들수록 산 유람이 책 읽기와 같다는 걸 알게 되네(今見遊山似讀書)

공력을 다해 봉우리에 오르면 스스로 내려오는 법(工力盡時元自下)

얕고 깊음의 경치를 살피는 것 모두 자기에게 달려있네(淺深得處摠由渠)

조용히 앉아 구름이 어찌 일어나는지 오묘함을 터득하고(坐看雲起因知妙)

산행의 행보가 정상에 이르매 비로소 원초를 깨닫네(行到源頭始覺初).

 

이 시에서 핵심 키워드는 시각초(始覺初)라는 석자다. 뜻인즉, 원천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누가 이 같은 원천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독서가 주는 깨달음의 경지는 퇴계 같은 조선의 대표적인 지식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여기 남송의 이학가(理學家)로 유학의 비조라 할 칭해지는 주희(朱熹)의 시관서유감이수(觀書有感二首)에 나타나는 책세상도 이와 같다. 제목처럼 지은이가 책을 보다가 느낌이 일어펄떡 일어나 쓴 시다.

 

반 이랑 네모난 못이 거울과 같아서(半畝方塘一鑑開)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잠겨 배회한다(天光雲影共徘徊)

어떻게 그처럼 맑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問渠那得淸如許)

근원에서 끊임없이 활수가 나와서라네(爲有源頭活水來).

 

책을 읽는 건 못에 끊임없이 활수(活水)가 흘러들어 맑아지는 것과 같단다. 근원적 깨우침은 계속 흘러드는 물에서 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무지는 산산이 깨져나가고, 새로운 활로가 트인다. 그 길은 너남 없이 가보는 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길이다.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에 가닿는 길이다. 마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가지 않은 길에 나오는 어떤 길처럼, 길에 또 다른 길이 있고, 그 길은 길을 낳으며 다른 길로 자란다. 그러나 어떤 길도 그 첫 순간에 맞닥뜨린 선택 앞에서는 두렵고, 가슴이 설렌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났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미지의 길 앞에서 풀섶 우거진 길을 선택한 시인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놓인 길은 걸어서라야 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풀이 발목을 붙잡으면 감발 치고 가면 된다. 인생의 깨달음을 얻는 데 그 정도 수고는 댈 것도 아니다. 이 시는 이 점에서 독서와 같은 면이 있다. 가고 펼치면서 깨닫게 된다.

 

독서는 사람됨에 반추를 가져오게 하는 영약이지만, 세상을 이해하고 바꾸는 혁명적 등불이 되기도 한다. 책과 사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며, 그 말을 뒤집으면 사상이 있는 글만이 세상을 엎어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진시황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황제사상을 유포하는 글이었다. 그는 책을 불태웠지만, 글이 불살라지지는 않았다. 글이 살아 있는 한, 책은 언제고 무덤 속에서도 다시 싹처럼 돋아난다. 책은 무한한 인류의 정신이 내장된 정신적 곳간이다.

 

이쯤에서 지난 세기와 금세기에조차 전 지구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사상가의 독법을 살펴보는 게 의미 있을 것이다. 두텁게 내리덮은 관념(불행하게도 늘 고정이란 단어와 짝이 되곤 하는)의 봉인을 풀고 보면, 세상을 바꾸려한 한 인간의 독서법과 만날 수 있고, 그가 열망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다른 점도 알게 된다.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인 칼 마르크스가 바로 그다.

 

캐나다 요크대 정치학과의 마르셀로 무스토 교수는 칼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주요 사건을 세 가지로 꼽고 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다가 3년간 중단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때 벌어진 연속적인 주요 경제사건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1847년 세계경제에 위기가 닥친 것과,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 동시에 금이 발견된 것이다. 금은 새로운 경제에 활력소로 작용하며 그가 생각해 온 혁명의 시기를 늦추어 버렸다. 불확실한 혁명의 시기에 마르크스는 꿋꿋이 지난 노트들을 재검토하고 더 깊이 있게 연구했다. 이 때 마르크스는 자신의 독서를 정리해 26권의 발췌노트를 만들었는데, 그중 24권은 18509월에서 18538월에 작성된 것으로 이른바런던 노트목록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는 습득한 지식을 정리 요약했고, 대영 박물관 도서관에서 탐독한 수십 권의 새로운 책도 연구하며 장차 저술하려는 작업에 필요한 사상을 습득했다. 런던 노트에는 그가 읽고 발췌한 수많은 작업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18509월부터 18513월 사이에 작성한 첫 번째 7권에서 그는 자신이 읽은 다음과 같은 책들의 목록을 추가하고 있다

 

토마스 투크의 가격의 역사, 저메인 가니어의 화폐의 역사, 제임스 테일러의 영국 화폐체계에 관한 한 시각, 헨리 소튼의 대영제국의 지폐신용의 성질과 효과에 관한 연구, 조한 게오르그 뷔쉬의 은행과 주화에 관한 제반 법칙,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또한 리카도 이론에 반대하거나, 일부 일정 개념을 발전시킨 저술인 존 데벌 투켓의 노동인구의 과거와 현재 상태의 역사, 토머스 호지스킨의 대중 정치경제학, 리처드 존스의 부의 분배에 관한 논문, 토머스 찰머스의 정치경제학에 관하여, 헨리 찰스 카레이의 정치경제학의 원리와 그 뒤를 이어서 아키발트 앨리슨의 인구의 원리, 아돌프 듀로 데 라 말레의 로마의 정치경제학, 윌리암 H. 피레스콧의 멕시코 정복의 역사, 페루 정복의 역사와 허만 메리베일의 식민화와 식민지의 교훈등이다.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방대한 책을 섭렵했던 것이다. 그가 이런 대저(大著)들을 읽은 것은 경제 위기의 역사와 이론에 집중해 위기의 기원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화폐 형태와 신용에 대해 보다 깊은 지식을 갖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을 주의 깊게 읽고는 두 권의 노트에 자신의 지식을 요약해 화폐에 관한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들이라고 간주할 만한 내용을 옮겨 적었다. 그러고는 여러 해 동안 계획해왔던 책을 저술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이론을 최초로 독립적으로 공식화 했다.

 

작업은 순탄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1850년에는 아들 구이도를 잃었고, 이태 후에는 딸 프란치스카를 잃었으며, 3년 후에는 8살 난 아들 에드가가 그의 손에서 떠나갔다. 절대 빈곤과 절망 속에서도 그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대영박물관에 가서 연구했고, 심지어는 새벽 4시까지 규칙적으로 글을 쓰면서 자신을 신념을 책으로 표현해 내는 일을 굳건히 수행했다. 피나는 혼신의 노력의 결과,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호불호가 극명히 대립하는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새로운 사상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극도의 궁핍 속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근본적으로 이 학문(경제학)에서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가 개인적 연구의 길을 통해 많은 진보를 이룩했고, 종종 매우 통찰력이 있다고 해도 그들 이후에는 진보가 없었다. ……나는 조만간 2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책! 그가 관심을 가진 건 세상을 바꾸는 혼의 무기였다. 마르크스는 연구와 글쓰기에 너무 많은 중단을 해야 했고, 방해를 받아 때로는 한밤에 계속해서 눈물을 쏟으며 격분하기도 했다. 그런 절망적인 조건에서도 책 읽기와 책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지구의 운명을 바꿔 놓는 사상가가 되었다.

책은 무릇 사람과 세상을 흔들어 놓아야만 한다. 그럴 때라야 책이다. 자신과 세상을 격변시키는 못해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포괄적 이해는 도와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꿈으로 가득한 책만이 읽을 가치가 있다. 오랜 시간 완숙을 향해 나간 인간의 대열은 어떤 경우에라도 책과 같이 운명을 했다. 내게 그런 책을 돌려다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터키에서는 피자, 유럽에선 파스타, 한국에서는 ‘3천년 빵’을 먹어야하는 특별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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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는 피자, 유럽에선 파스타, 한국에서는 ‘3천년 빵을 먹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

 

밀은 벼과 밀속에 속하는 1년생 초본으로 현재 23종이 재배되거나 야생종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곳곳의 다양한 지역 음식은 왜 돌아와서 먹어보면 현지 맛과 다를까? 특정 음식은 왜 해당 지역에 가서 먹을 때라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세계 어디서건 먹을 수 있지만 터키에서는 피자를, 유럽에서는 스파게티를, 한국에서는 3천년 빵을 먹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 같은 것 말이다. 이 답을 찾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야생을 누비다 우리 곁에 와서 길들여진 밀(소맥小麥, wheat) 품종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밀속()에 대한 세포유전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30년대 무렵부터였다. 그 당시 주된 관심은 종간(種間)잡종 연구였다. 복잡한 유전체 연구는 옆으로 치워두고라도 이 같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트란스코카사스(아제르바이잔과 코카사스산맥 지역)와 터키, 이라크 및 이들 주변 지역에는 2배종의 밀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 밀은 1립계 밀(염색체의 수가 14)인 트리티컴 보이오티컴(Triticum boeoticum)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밀은 야생밀로 구석기 유적에서도 발굴되는데 주로 선사시대 주민들에 의해 채집되어 식용되었고, 가장 오래 전부터 인류가 재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종자는 대체로 청동기 시대 이후로는 재배가 줄기 시작해 오늘날에는 거의 재배되고 있지 않다. 일종에 유적이 된 종자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건강식품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재발견되었다.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빵밀도 이 야생밀로부터 유전적으로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그 사이 이 야생밀 종자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이 밀 종자는 그 후 사람과 가축이 이동하는 것과 함께 옮겨졌고, 새로운 풍토에서 새로운 야생종과 만나 새로운 살림을 꾸렸다. 잡종 교배가 모든 밀 종자에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 밀 품종을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격렬한 사랑으로 태어난 자식들은 예전보다 가축과 인간의 입에 더 잘 맞게 유전적 성질이 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인간 속에서 인간과 함께 하는 가장 친숙한 곡물로 남게 되었다. 지역마다 다른 밀 품종은 다른 입맛을 가져왔고, 그에 맞는 음식, 요리 문화를 가져왔다

 

야생종과 재배종의 중간 종자인 이 밀로 만든 최고의 음식은 터키에서는 피자다. 이 밀 종자를 갈아 피자를 구우면 밀가루 본래의 본토박이 피자 맛이 난다. 지금도 터키에서는 불에 구운 부풀지 않는 납작한 피자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 특유의 밀을 이용하고 있다. 만약 운 좋게도 터키의 바자르(시장)나 레스토랑에 가게 된다면 피자의 사촌뻘인 라와시와 케밥부터 주문할 일이다. 그곳 특유의 밀로 만든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유럽 쪽으로 건너가면 토핑(topping)을 한 피자가 유행한다. 그것은 야생이 사라지고 난 뒤 덕지덕지 개칠되고 덧붙여진 유럽식 식문화의 상징이다. 그러고 보면 유럽문화라는 것은 대부분 무엇을 덧얹어 만들어 진 것들이다. 그리스의 헬레니즘이 기독교의 헤브라이즘의 원형이 되었듯이. 기독교인들은 천상과 지상의 모든 신들을 상상과 폭력적 방법으로 하나로 통합해 냈을 때 짜릿함을 맛보았을까?

 

이와 다른 밀속 종자로는 원시적 재배종인 야생 2립계 밀 트리티컴 디코쿰(Triticum dicoccum)이 있다. 이 종자는 신석기 시대부터 1년에 평균 5킬로미터 속도로 진군해 지중해 연안 및 중부 유럽에까지 전파되었다. 에티오피아, 모로코 등 아프리카 지역과 이란, 코카사스, 아라비아, 인도 등 아시아 지역, 스페인, 중부유럽,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발칸반도 및 불가지방 같은 유럽 지역에서 오랫동안 재배되었다. 주재배지는 중동이라 부르는 근동(近東)지역이다. 이 종자는 고대에는 광범위하게 재배되었지만, 지금은 유럽과 아시아 산악지역에서 재배되어 언필칭 유적이 되어버린 곡물이 됐다. 그럼에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종자의 가치는 끈질긴 생명력에 있다. 어떤 열악한 토양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는다. 병충해에 강한 장점도 있다. 이 종자는 미국은 물론, 모로코, 스페인(서북부 아스투리아스 지역)과 체코와 슬로바이아의 국경 지대인 카르파티아 산맥의 산악지대와 알바니아, 터키, 스위스,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서 자란다. 미국에서도 특별한 농산물로 재배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이 밀을 이용해 전통음식을 만든다. 특이한 점은 이탈리아에서는 이 종자를 잘 관리해 재배 지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는 점이다. 가페가나 지역에서는 파로(farro)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법적으로 재배 지역은 보호받고 있다. 이 파로는 건강식품으로 유럽 전역의 상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고 영국의 슈퍼마켓에 들르면 선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종자는 주로 사람들의 음식으로 쓰이지만, 가축 사료용으로도 쓰인다. 사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영양가나 섬유질을 필요로 하는 면에서는 대체로 같다. 우리는 바다를 건너 온 같은 포유류들이다.

 

이 밀은 맛은 물론 섬유질 면에서도 훌륭한 빵을 만드는 데 쓰인다. 스위스를 비롯해 이탈리아 등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른 종자보다 섬유질이 길어 특히 파스타를 만드는데 쓰인다. 최근에는 건강식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 종자의 특색이라면 그 후 돌연변이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16세기 이후 마카로니 밀(T. durum)이 여기서 나왔고, 온대 건조 기후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 지금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재배되는 밀이 되었다. 지중해연안 지역에는 특별히 마카로니나 스파게티가 발달해 있는데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이 밀 종자 때문이다. 이 밀은 부질(gluten, 빵의 골격을 이루는 단백질로 빵을 부풀게 하고 끈적거리게 하는 성질. 밀가루 음식이 소화가 잘 안 된다는 통념은 일반적으로 그루틴 때문이다. 현재 식품업계에서는 그루틴 안전(Gluten Free)’ 식품을 만들기도 한다.)이 풍부하고 경질성을 띠어 두 음식의 원료로서 적합하다. 지중해 나라들에 가서 마카로니나 스파게티를 찾아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밀 종자의 변천사는 조만간 전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인간에 의해 식용되는 종자로 진화한다. 지도를 펼쳐보면 밀 종자의 확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다루는 가장 범용적인 종자는 지도에서 보듯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 퍼져 그야말로 세계제국을 형성하고 있다. 어딜 봐도 이 종자뿐이다. 진화와 적응의 과정에서 보여준 승자의 궤적이자, 우리 입과 위장은 물론 소화기관도 이 종자와 관련 맺고 있다.

  

 

 

 

 

 

 

 

 

 

 

 

 

 

 

밀 종자 중 하나인 트리티컴 아에스티붐(Triticum aestivum)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넓게 분포해 있는 종자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풍토에 잘 적응한 앉은뱅이 밀도 지난 100년간 종자 면에서 달라진 건 없다. 이건 우리 입맛과 체질이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같은 T. 에스티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수입 밀을 먹고 있다. 한국은 전체 곡물 자급도가 단지 27퍼센트에 불과한 농업 취약 국가다. 특히 밀은 국내 산출량이 극소해 생산량도 연간 4만여 톤에 불과하고 자급률도 0.2퍼센트에 불과하다. 같은 종일지라도 생산지의 환경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것은 틀림없다. 우리 입은 수입 밀로 만든 음식에 이미 익숙해 질 때로 익숙해져 있는 상태다. Source: Triticum aestivum distribution map. Data from Global Biodiversity Information Facility (GBIF) &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 & http://agris.fao.org/agris-search. 

 

  

 

빵밀인 트리티컴 아에스티붐 L(Triticum aestivum L.)은 오랜 세월 돌연변이와 수많은 야생 밀과 자연스럽게 유전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진 종자로 우리가 매일 먹는 종자도 바로 이것이다. 기원전 7000년 전 유로-아시아 지역에서 재배되었으며, 다양한 야생 종자가 채집된 뒤 식용 목적으로 재배되었다. 이 종자는 오늘날 제빵업에서 확고히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그림은 야생 밀의 유전자 결합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Source: Picture by Kalda, M., MPIZ. Text by Dr. Wolfgang Schuchert.

 

 

빵을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빵밀의 경우는 어떨까?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빵을 만드는데 최적격인 빵밀인 트리티컴 아에스티붐(Triticum aestivum)은 한대에서 열대로, 건조지에서 습윤지로 폭넓게 적응하며 생태적 분화를 이루어냈다. 그 결과 세계 구석구석에서 재배되는 세계적인 밀이 되었다. 빵이 전 세계 곳곳에서 애용되는 식품이 된 것은 밀이 냉온을 가리지 않고 지배에 적응해 왔기 때문이다. 이 종자는 기원전 5천년~4천년 경 서남아시아와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의 도나우강과 라인강 유역에 이르렀고, 흑해의 서해안 전역과 남러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이어 기원전 3천년 경에는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같은 시기 아라비아를 거쳐 아프리카로 전파되었고,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1천년 뒤에는 인도와 중앙아시아로, 그 후 기원전 2천년 경에는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에 전파된 이 종자는 음식 문화의 변화를 가져와 밀가루로 가공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그 뒤 가루음식이 잇따라 개발되고 수요가 급증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만두, , 국수, 심포자, 교자 등 다양한 밀가루 음식은 이런 사실을 잘 밑받침해주고 있다. 밀은 심지 않은 곳이 없었고, 면은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중국인들은 밀을 이용해 삶고 찌고 굽고 튀기는 방법으로 다양한 요리를 개발해 냈다. 굽는 방법으로 발효법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중국식 빵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밀 종자는 기원전 1천년 경이 되면 한반도에까지 건너오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3천 년 전이다. 따져보면 우리가 빵밀을 먹은 것이 대략 3천년이나 되는 것이다. 실로 장구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손과 짐, 그리고 가축의 털과 위장에 붙어 밀 종자는 끊임없이 이동을 거듭하다가 한반도에까지 들어 와 정착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수천 년 간 밀은 우리와 더불어 재배되어 왔다.

 

그런데 이 유구한 종자가 불과 30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처하는데, 그 주요 요인은 한국 정부의 정책 때문이었다. 수입자유화와 1984년에 시행된 정부의 수매 중단 정책이 직격탄이었다. 우리 손으로 우리 종자를 죽이고 수입 밀을 들여다 우리 식탁에 쏟아 부었다. 이때 우리 밀 말살 정책에 적극 가담한 측은 대한민국 정부와 제빵 및 제분업계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이었다. 정부는 개방이란 이름으로, 대기업은 보다 높은 이윤추구를 이유로 이 말살의 선두에 섰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 들어 죽어가던 우리밀이 가까스로 근거리 먹거리와 우리 식재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되살아나고 있다. 그럼에도 년 간 생산량은 단 4만여 톤에 불과하다. “강나루 건너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는 이제는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다. 밀이 위기면 우리 먹거리도 위기고, 우리가 각자 하나씩 꿰찬 위장이나 장기(臟器)조차도 위기다. 유전자 조작과 방부제에 절은 수입 밀수입도 문제지만, 다른 밀속에 해당되는 종자가 맺은 곡분으로 빵을 만들어 먹을 때 제 맛을 느끼기도 어렵다. 미세한 맛 차이라도 그 차이는 식문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풍속도 바꾼다. 터키에서는 피자를, 유럽에서는 파스타나 마카로니를, 한국에서는 우리의 ‘3천년 빵을 먹어야 할 이유는 뚜렷하다. 이 땅이 우리 거라는  주장을 하려면 여기서 자라는 것들과 무관한 듯이 행동하는 오만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탐욕에 눈이 멀어 우리 것을 말살하는데 나서고 있다. 우리 밀로 빚은 우리 빵 한 조각을  매일 식탁에서 만나고 싶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히말라야 산군을 한 눈에 바라보며 경영을 통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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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산군을 한 눈에 바라보며 경영을 통찰한다!

‘에임하이 히말라야 써밋 CEO 과정’에 대한민국 경영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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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Copyright (c). Himalaya Kanko Kaihatsu Co. Ltd. All rights reserved

 

 

▶ 히말라야-에베레스트에서 통찰하는 자아와 경영의 세계!

격동하는 글로벌 도전 앞에 대한민국 경영자들은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 허들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짐 콜린스는 21세기 새로운 경영의 신천지를 차지하게 하기 위해서는 크고 대담하며 도전적인 목표(BHAG)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또한 경영전략가인 제이 바니는 초경쟁을 뚫고 나갈 전략으로 남들이 자사의 역량을 모방할 수 없게 하라고 했다.

경영은 자아와 세계를 만나는 것이며,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 왜 우리는 높은 산에서 경영과 인생을 조망하려 하는가?

비유하자면, 강풍이 불 때 독수리는 더욱 멀리 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글로벌 도전에 맞선 경영자들은 누구보다 드높은 경영 목표를 세우고 도전에 적극 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경영과 삶의 목표를 높게 성취하고, 자아와 세계를 통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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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CEO들이 ‘Aim High’의 영감을 받는 곳!

전 세계적으로 연간 약 7200여명의 경영자들이 에베레스트를 찾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높은 산에 서면 새로운 도전의 큰 울림이 가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낮은 산만 올라서는 ‘높은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높다’는 건 추상일 뿐이다. 그러나 고개를 꺾어 올려다볼 정도로 높은 8848미터 산을 바라보노라면 ‘높은 산’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것은 경영자의 비전으로 머리 속에 각인된다. 그러며 차원이 다른 목표가 설정되는 것이다.

본 과정의 경영 컨퍼런스는 로체(8,516m), 아마다블람(6,865m) 등 에베레스트 산군이 한 눈에 바라보이는 3820미터에 위치한 에베레스트뷰 호텔에서 2일간 개최된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은 제1세션으로 ‘경영의 산을 오르는 7가지 방법’과 제2세션으로 ‘글로벌 경제와 창조적 기업의 조건’을 강의하고, 유명 산악인도 등반경험을 함께 나누게 된다. 또한 3800미터 산정에 네팔 고승 두 분을 초청해 ‘네팔 고승과의 대화 – 에베레스트에서 듣는 삶의 지혜’를 경청하며 더불어 명상의 시간도 갖는다.

에베레스트 산군은 그 자체로 무한 감동을 안겨주는 웅장한 대자연 컨텐츠이다. 이 속에서 경영자들은 이번 과정을 통해 새로운 통찰과 비전을 갖게 되고 자신의 염원과 비전을 담아 ‘임직원, 가족 등 지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개별적으로 촬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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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00미터급 산 정상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새로운 도전을 결심하는 바로 그 곳!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퇴임 후 히말라야에 있는 쿰부 롯지를 가장 먼저 찾았다. 그는 왜 히말라야에 갔을까? 거기 가서 무엇을 본 것일까?

장엄한 히말라야와 일출을 보며 그는 저 아래에 내려가 해야 할 일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국제민간외교활동과 헤비타트 운동이 그것이다. 이런 활동으로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에베레스트에서 바라본 깊은 자기 내면의 성찰과 새로운 목표인 ‘에임하이’가 그를 재임 시보다도 우뚝 올려놓았던 것이다. ‘에임하이 히말라야 써밋 CEO 과정’은 바로 이 세계의 지붕에서 나의 삶과 경영 전체를 조망하는 기회를 부여하며 참가 경영자들 리더들 간의 친목과 유대를 강화한다.

▶ 높은 목표를 가진 자만이 끝내 목표에 이른다!

한번도 8800미터급 산을 보지 않는 사람에게 에베레스트 산은 관념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초우량 기업의 비전을 보지 못한 기업에게 ‘초우량’이란 말은 그저 관념에 불과하다. 높은 자기 성취를 위한 도전을 해보지 않는 리더는 어디가 높은지 알 수 없다.

이제 대한민국 리더들이 두 발로 에베레스트를 딛고 걸으며 에베레스트 산군 앞에서 초우량 기업이 되는 강력한 실행력과 세상을 뒤흔들 강렬한 비전을 세우고자 한다. 본 과정은 경영상의 도전의식을 고취시키고, 하고자 하는 의지, 즉 ‘Willing Sprit’를 갖게 한다. 마치 산의 들머리부터 날머리까지 준비된 자세와 역량으로 산행을 하듯 인생에서 도전의 각 단계마다 새롭고 남다른 전략을 수립하여 다시 강한 힘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준다. 무엇보다도 경영자들의 내면에 큰 산이 들어서게 한다. 숨은 자아를 만남으로서 내적 성장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리더들과 함께 하는 트래킹의 참 묘미!
이 과정의 목표는 분명하다. ‘몸은 가볍고 머리엔 영감이 가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현지에 도착하면 국내선 비행기와 헬기로 에베레스트뷰호텔까지 신속히 이동하여 이틀간의 과정을 이수하고, 과정이 끝나면 바로 같은 일수의 트래킹 일정이 잡혀 있다. 하산 길에는 2명의 한국어 능통 가이드와 12명이 포터들이 안전하게 길을 인도한다. 걸으며 즐기는 롯지에서의 네팔 음식도 트래킹의 묘미를 더해주며, 함께 땀을 흘리고 성취를 공유하며 친목을 도모한다. 본 과정 후에도 이 모임은 지속되며 다양한 정보교류와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마련할 예정이다. 트래킹 중에는 소통의 시간을 통해 더욱 친밀한 관계를 다지며 자기 비전이 샘솟도록 도와 준다. 그리고, 카투만두 시내에서는 5성급 호텔인 야크앤예티 호텔에 사흘간 머물며 네팔의 진기한 관광 명소를 둘러보는 고품격 과정으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 교육 상세 내용

- 일시 : 2016년 5월 20일~27일 (7박 8일)

- 장소 : 네팔 카투만두와 에베레스트 산정 일대

- 대상 : 기업 CEO, 오너, 임원급, 기관장급, 문화예술인, 사회활동가 외

- 비용 : 550만원 (VAT 별도)

- 신청 및 안내 : http://hceo.mk.co.kr/


[매경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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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대한민국 CEO들이 에베레스트에 모인다(‘에임하이 히말라야 써밋 CEO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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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대한민국 CEO들이 에베레스트에 모인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히말라야서 ‘에임 하이’ 경영의 진수 느낄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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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혁신에 나서는 기업 활동과 산행에서 맞부딪치는 온갖 도전을 풀어가는 과정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특히 히말라야라는 천예의 고산을 등반하는 과정은 인생과 경영을 통찰하고 글로벌 도전에 맞설 ‘윌링 스피릿’을 제시하는 ‘에임하이’ 경영의 진수라 할 수 있습니다”


히말라야 등반을 통해 인생과 경영의 지혜를 획득하고 동반자들과 우애를 나누는 ‘에임하이 히말라야 써밋 CEO 과정’이 오는 5월 20일부터 5월 27일까지 7박 8일 일정으로 네팔 카트만두 일대와 에베레스트 산정에서 개최된다. 이번 과정을 기획한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사진)은 다채로운 이력을 바탕으로 국내 유수 기업의 임직원들에게 ‘에임하이’ 경영을 설파하는 전도사다.

전 소장은 뉴욕시립대에서 방송경영학을 전공하고 국내 유수 대기업을 거쳐 야후코리아 총괄임원을 역임한 인물이다.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갑자기 은퇴해야 했던 그는 이후 전국 산을 돌며 인생과 경영의 잠언을 구했다. 이 때 72명의 CEO를 만나 산을 오르는 지혜를 나눈 경험을 정리한 것이 ‘CEO, 산에서 경영을 만나다’이다.

전 소장이 산과 경영, 나아가 산을 통해 얻은 새로운 발상으로 인문과 경영을 묶어 정립한 것이 바로 ‘에임 하이’ 경영이다. 경영혁신에 나서는 기업 활동과 산행에서 맞부딪치는 도전을 풀어가는 과정이 다를 바 없다는 ‘에임하이 히말라야 써밋 CEO 과정’의 사령탑 전경일 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에임하이 히말라야 써밋 CEO 과정’을 기획한 계기는?

에베레스트 트래킹은 내 오랜 숙원 중 하나였다. 국내 산을 돌다 높은 정상에서 통찰하는 경영의 지혜를 모은 것이 ’CEO, 산에서 경영을 배우다’였다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8848m 에베레스트 정상에서는 또 다른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히말라야 일대를 한달간의 일정으로 트래킹하다 얻은 교훈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그 순간 8년 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과정에 대한 큰 그림이 잡혀 추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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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산을 접목했는데 특별히 이 두 요소를 결합한 까닭은?


경영과 산행은 기본적으로 같다. 오르내리는 과정에 경영이란 말만 붙이면 어느 것 하나 다를 게 없다. 경영자가 경영이든 인생이든 오르는 것만을 목표로 하면 배울 게 별로 없다. 내려오는 절차와 순서, 때를 알고 자연스럽게 등로를 밟는 것이 산행 원칙이듯 경영도 이와 같다.

산을 통해 인생과 사업의 가르침을 안다면 새로운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갈 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고전적인 답을 내놓는다면 ‘그곳에 산이 있듯’ 그곳에 경영현장과 경영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에베레스트에서 무엇을 보고 얻을 수 있나?

히말라야는 가장 열악한 것들을 내놓는다.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날씨, 야생의 자연, 우리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 등 거의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것들이 거침, 황량함, 장엄함이 불러일으키는 원시적 교감을 제공한다. 산행을 즐기는 사람은 이 말을 알 것이다.

가슴이 뻥 터져 버린 적 있는가? 눈물 나도록 저 산군이 아름답다고 느껴본 적 있는가? 그 속에서 순백의 자신과 조우해본 적 있는가? 이런 감동과 경험을 통해 내가 지금 누리는 것의 감사함을 알고 높은 산에서 가지는 담대한 마음과 무장무애(無障無?)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이런 감동을 영혼의 허기를 느끼는 대한민국 리더들과 함께 나누고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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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CEO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오너, 임원, 기관장, 문화예술인, 사회 활동가 등 포괄적으로 참가 자격을 부여하던데 이유는?


맞다. 이들을 한마디로 묶으면 ‘대한민국 리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에임하이 히말라야 써밋 CEO 과정’은 대한민국 리더에게 ‘에임하이’를 경험하게 하고 다양한 분야의 깊은 인적 교류를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산 아래에서 각자 하던 일을 잠시 잊고 에베레스트에서 ‘헤쳐 모여!’ 하는 것이다. 어느 특정 분야보다는 각 분야 리더가 모여 본 과정을 통해 새롭게 인적 교류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 다른 경험이 모여야 남다른 경영의 산을 이루지 않겠는가? 과정 이후에는 국내 주말 산행을 통해 지속적으로 건강도 증진시키고 히말라야 관계망도 형성하려 한다. 이것이 가장 큰 자산일 것이다.

이번 과정을 마친 뒤 다음 계획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을 떠날 수 없다. 특히 건강 때문에라도 산에 다닌다. 본 과정은 ‘세계 최정상에서 개최하는 회의’ 즉 ‘써밋 2 써밋’이란 부제처럼 자신과 경영을 돌아보고 톺아보는 깊고 높은 자아에의 성찰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네팔 고승과의 대화, 에베레스트에서 듣는 삶의 지혜’ 특강과 명상의 시간도 함께 갖는 것이다.

히말라야를 다녀온 뒤에는 산과 경영의 만남을 꾀하는 다양한 산행 활동을 추진할 계획이다.멋진 산과 경영이 어우러진 끈끈한 커뮤니티가 될 것이다. 영혼 깃든 산행에 여러분들을 초대하고 싶다. 함께 가서 더불어 느껴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에임하이 히말라야 써밋 CEO 과정’에 대한 문의는 전화(02-812-3582)나 홈페이지(http://hceo.mk.co.kr/)를 통해 가능하다.

[디지털뉴스국 김용영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남아프리카 대초원에서 ‘학익진법’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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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대초원에서 학익진법을 찾다

 

일제집중타방전법(一齊集中打方戰法).’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조금은 낯선 한자어인 이 말은 병법에서 나온다. 자원을 한 곳에 집중해 적을 물리치는 전법을 뜻한다. 이 전략은 저 유명한 학익진법(鶴翼陣法)에서 찾아진다. 학익진의 진용을 떠올려보고자, 드넓은 한산도 앞바다에 뛰어들면 400여 년 전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장군이 맹활약한 한산안골포 해전을 만나게 된다. 이 작전에서 장군은 저 유명한 학의 날개로 적을 감싸 적세(賊勢)를 꺾으며 일대 전환을 꾀해 냈던 것이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 아 바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한산대첩은 임진년(1598) 76일부터 13일까지 8일간에 걸쳐 한산(견내량) 및 안골포에서 적선 89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한 쌍방 간 교전이 가장 치열했던 대전을 가리킨다. 견내량 해전은 왜군 측에서는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주력함대 73척을 끌고 나왔고, 이순신 장군은 함대 56척을 몰아붙여 맞선 대결전이었다.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과 같은 큰 배는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지형만 놓고 보자면 조선수군이 당연히 불리했다. 불리한 지형을 장군은 혁신적 전법으로 돌파했다. 나라의 운명을 건 대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저 유명한 혁신 전법인 학익진법이 전면 등장하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궁금한 점은 이 신출 전법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장군의 3차 출동은 5, 6척의 군선으로 적을 봉쇄 유인하여 섬멸하는 이른바 인출전포지계(引出全捕之計)였다. 작전 수행을 위해 장군은 진형을 학의 날개 모습으로 짰다. 이 같은 진형 전개는 적의 주된 전투 제대 중심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펼치는 것으로 아군의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원래 학익진은 육전에서 쓰던 전법이었다. 그러던 것이 해전에 맞게 일부 변용되어 운용되어 왔다. 육지에서 바다로 넘어오며 학익진의 형태도 변화되었다. 일반적으로 육상에서는 횡렬진을 띠지만, 해전에서는 첨자찰(尖字札, 복쐐기진)이나 일자진(一字陳, 횡렬진)을 이룬다. 전방 날개는 오목꼴, 좌승함 뒤쪽은 작은 쐐기골 모양을 이룬다. 좌승함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다

 

학익진법으로 대형을 바꾸려면 민첩하고 정확한 상황 판단이 뒤따라야만 한다. 전함 건조 시 밑바닥을 평평하게 해 기동성과 회전력을 높인 것은 적지(適地)에 맞는 전략적 유연성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장군은 견내량 전투 시 이 전법을 한판 승부 카드로 꺼냈다. 거북선과 학익진의 결합은 상상을 초월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승세를 거머쥐게 했다. 한마디로 전술 무기와 작전이 온전히 화학적 결합을 이뤄낸 것이다. 무적 이순신 함대의 비밀은 이처럼 과학기술과 전략의 탁월한 결합에 있다.

 

여기에 주요 시사점이 있다. 학익진이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하려면 학의 모양을 한 전투대형에 적을 끌어 들이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에워싼 다음 집중 화포공격을 가하는 함포전이 뒤따라야 한다. 날개를 펼쳐 적을 둘러싸고 위압해 일시에 방포함으로써 적을 무력화시켜야만 한다. 임란 전 장군이 지자, 현자, 승자 등 각종 총통 개발에 몰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유인된 적은 바다 한가운데서 학익진으로 둘러싸여 총통 세례를 받고 기세를 잡은 아군은 앞 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화전을 번갈아 쏘아 적선을 불 지르고 적을 사살했다. 여기에 함대 간 연락 체계라든가 일사불란한 지휘와 수행이 밑받침됐다. 전 전투 과정에서 정치(精緻)한 프로세스를 실현해 냈다. 또 전략병기를 중심으로 전투 수순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수행해 냈다. 전투 수행 시 절차와 수순은 최고의 혁신 공법으로 전투시간에도 주력집중방식을 적용해 최적화해 냈다. 그것은 가능한 짧은 시간에 승부를 결정짓게 함으로써 아군의 전력 손실을 막고 적에게는 짧은 시간 내 궤멸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제 승리는 우리 손에 들어 온 거나 다를 바 없었다.

 

한산대첩은 이처럼 집중타격방식의 가장 모범적인 예이자, 자원집중화 전략을 통해 얻은 최대의 대첩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우연하게도 이순신식 학익진법이 저 멀리 아프리카 투쟁사에서 발견된다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건국 무렵인 1835년 아프리카계 백인에 해당되는 트랙보어(Trek Boer)는 토지를 찾아 아프리카 내륙부로 이동했다. 이때 트랙보어들이 노린 지역은 인도양을 따라 펼쳐져 있는 나타르 지방이었다. 이곳은 원래 흑인 원주민인 줄루족이 연방 국가를 세운 지역이었다. 아프리카계 백인들이 공격하기 전 줄루족의 샤카 족장은 징병제도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식량원으로 옥수수를 지배하는 한편, 공업을 일으켜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줄루 족장은 주변 씨족들을 병합해 나갔는데 이때 저 유명한초승달형 병법을 써서 적을 굴복시켰던 것이다. 이 병법은 주력부대의 양측 면에 각각 돌격대를 배치해 적을 협공하는 전략이다. 학익진법과 생김새도 같다. 사캬 족장은 이 전략을 써서 10년간 전투를 벌인 끝에 오늘날 나타르 북부에서 모자비크 남부에 걸친 광활한 평야 지대를 지배할 수 있었고, 4만에 달하는 군대를 보유한 줄루 왕국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44년 지나 1879년이 되었을 때 줄루족은 남아프리카 나탈 지방에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군과 일대 전쟁을 치르게 된다. 개전 초 영국군은 줄루왕국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줄루족은 샤카 치세 동안 주변의 반투족을 정복해 이미 인구만 50만 명에 이르렀고, 4만 여명의 정예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줄루족의 전사들은 맨발로 하루 70킬로미터를 달려야 전사로서 인정되는 등 혹독한 훈련 속에서 거듭난 용사들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점은 무기였다. 손에 쥔 아세가이(짧은 창)와 소가죽 방패로는 현대적 무기를 사용하는 영국군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죽음을 불사하는 선방으로 줄루족의 왕 케츠와요는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로크스드리프트(Rorke's Drift)에서 승리한 영국군이 병력을 증강해 다시 쳐들어오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영국군은 줄루왕국을 정복하고 13개 소국으로 분할시켜 버렸다. 근대 제국주의의 분할 정책이 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것이다. 이때부터 아프리카는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백인들의 정책으로 동족을 미워하는 극한의 대립과정을 겪게 된다.

 

줄루족은 부족 간 대회전에서 양쪽 끝의 강력한 기동력을 바탕으로초승달형 병법을 써서 적을 완전 제압했지만, 영국군에 대해서는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미 창과 방패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백인들에게 무참히 패배했지만, 부족 내부 간 전쟁 시 샤카 족장이 보여준 혁신전법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유효했다.

 

생각해 보면 초승달과 학익은 생김새도 같다. 좌우측 끝의 강력한 기동력을 전제로 주력을 집중해서 적을 섬멸해 낸다. 고래로부터 전해 오던 육전법 학익진이 이순신 장군에 의해 해전법으로 변환 운용된 것처럼, 샤카 족장은 아프리카 고유의 육전법으로 적을 무찔렀다.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시공을 뛰어 넘어 혁신적 사고를 하는 혁신가들은 어디든 있다.

 

이 우연한 일치를 보며 생각해 보게 되는 게 있다. 이 두 작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이런 걸 가리켜 어떤 종의 한 개체가 습득한 행동 양식은 다른 개체에게 전파된다는 이른바 루퍼트 쉘드레이크의형태공명장이론을 떠올리곤 한다. 이런 주장의 밑받침이 되는 이론이 일본의 생물학자 겐이치 이마니시가 밝힌 바 있는101마리 원숭이이론이다. 혹은 경영학 분야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용어로 말콤 그래드웰이 주창한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이론이 있다.

 

세상엔 상호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이순신의학익진법이든, 줄루족장의초승달형 병법이든 우리는 상호 연관되는 우연성이 만드는 세상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인간은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인류가 경험해 온 다양한 역사, 문화적 사례들에 눈을 돌리면 때로는 현실에서 못 찾던 해법이 보인다. 이런 건 어떤 의미에서 공통된 경험과 문제와 해법에 다가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잘 안다는 우리 중, 장군의학익진법이 다음 시와 연결되는 걸아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한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水國秋光暮)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떳구나(驚寒雁陳)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 창 너머로 활과 칼을 비추네.(殘月照弓刀)

 

장군이 지은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의 전문이다. 가을빛은 저물고 기러기는 V자로 떼 지어 날아간다. 이 풍경을 바라보며 장군은 우연찮게 안진(雁陳, 기러기진)을 떠올린다. 임진년 여름(76일부터 13일까지 8)V자로 적을 에워싼 학익진법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전란이 있기 바로 직전 년도에 여수의 전라좌수영에서 전란을 대비하던 장군은 남해 앞바다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며 골똘히 승리에의 방책을 떠올렸다.

 

대첩을 치른 그 해 늦가을에도 장군은 한산도의 노을 지는 서녘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다시금 절박한 생각에의 방아쇠를 당겼다. 거북과 자라를 3개월간 방안에 놓아두고 관찰하였던 그 질긴 습관처럼 조국의 풀 한 포기, 돌 하나도 가벼이 보지 않은 장군의 몰입의 경지를 엿보게 한다.

 

 

 

(왼쪽) 이순신 장군이 보았던 흑기러기는 지금도 남해 일대에 날아와 월동을 하고 봄이 오면 시베리아 등지로 날아간다. 계절은 변함없건만, 가을 철새를 바라보는 격지지감은 새롭기만 하다.  (오른쪽) 장군은 한산도의 저물어가는 수루에서 극도의 몰입을 한 끝에 좌수영 위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군대의 진영[軍陣]으로 비유해 극한의 일체감을 표현해 내는 시를 썼다. 이순신적 관찰과 집중은 이 시의 두 글자, ‘안진(雁陳)’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철마다 흑기러기, 회색기러기, 쇠기러기, 흰이마기러기, 큰기러기, 흰기러기, 개리 등 일곱 종의 기러기가 찾아온다. 국립공원철새연구센터에 의하면, 남해안으로 날아오는 기러기에는 흰기러기와 흑기러기 단 두 종류뿐이다. 이 중 장군이 보았던 기러기는 짐작하건대, 틀림없이 흑기러기(Brant Goose)였을 것이다. 먼 시베리아로부터 겨울을 나기 위해 무리 지어 날아 와 한산도의 저물어 가는 바다를 힘겹게 지나 소매물도나 다대포, 낙동강 하구 쪽으로 가거나 대마도로 가는 무리들이었다. 장군의 시선은 그들 무리에 가닿았다. 시기적으로는 첫 동정의 무리가 날아드는 11월경이었다. 새들은 깃털 사이에 공기를 가득 모으고 날개를 부풀려 추위를 막아가며 이 먼 바다 위를 날아갔다. 기러기의 V자형 대열도 인상적이지만, 흑기러기의 흰색 목 띠에 나 있는 쐐기모양[⫷⫸]의 흰 줄도 이 시와 관련되어 범상치 않다.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기러기를 신()·()·()·()·()을 갖춘 새로 여긴다. 장군이 기러기를 바라보며 스스로 반추하였을 단서가 된다.

 

만약 이를 요즘 식으로 해석한다면 어떨까? 기러기 떼의 이동을 보며 장군은 마치 오늘날 특정 사업이나 지역에서 우위를 점한 후 타 사업이나 지역으로 확산해 나가는 안행형(雁行形, flying goose)우위확산 전략이나, 선행(先行)기러기가 그린 항적(航跡)이 뒤 따라 오는 새에게 양력을 얻게 하는 윈드서핑 효과(wind surfing effect)같은 걸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까닭에 한산대첩의 승리가 이후 전투에 지속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승리를 이근 모든 전투에는 이 원리가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선인들의 글 행간을 열고 들어가 보면, 관심 두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장군의한산도야음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행간(行間)을 주파하는 독법도 이와 같다. 많은 사념을 길게 드리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이순신 장군의 통섭형 지식과 전략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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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통섭형 지식과 전략 캠퍼스

 

휴가를 자청해 집필 관련으로 남해 한려수도 일대를 돌아보았다. 남해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이토록 많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군은 가까이에 있었다. 그런데도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줄로만 알며 살았다니! 400여 년 전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그를 만나며 남다른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2323승의 무결점 완벽한 승리야 익히 아는 바이지만, 승리의 원천을 만들어 낸 이순신적힘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장군 관련 자료를 다시 훑으며 이순신적 힘이 인문과 타학문 분야가 결합된 통섭적 발상에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가 익히 아는 거북선은 조선수군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과 함께 핵심 전함인데 배의 건조 방법부터가 특이하다. 거북선은 간소화 선형 방식의 설계를 따름으로써 건조시간, 비용, 노력 등 여러 면에서 경쟁우위를 가졌다. 간소화 선형이란 핵심에 집중한 단순화 전략을 취한 걸 말한다. 용골을 중심으로 U자형으로 배를 제작하는 것과 달리 평평하게 건조해 원가를 1/4 이상 절감했다. 전시 자원 활용책이다. 또 판옥선에 용머리와 철갑을 씌우게 했는데 그 즉시 거북선으로 변신한다. 이런 트랜스포밍은 유연한 제작 방식을 취하려 했기 때문이고, 판옥선에 쓰인 공용재(일테면 공옹부품)를 거북선이 80퍼센트나 쓴 까닭에 대한 설명이 된다. 이 모두 급박한 전시 상황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변신력은 전투에서 즉각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판옥선이나 거북선은 전투가 벌어지는 지형에 맞는 배의 구조였다. 남해안의 낮은 연안 수심을 고려해 회전력과 기동성을 높인 것은 평평한 배의 구조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거북선의 밑바닥이 평평한 것은 판옥선의 구조를 본받은 것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큰 우리 해안의 특성이 전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낮은 선복은 얕은 바닷가에서 큰 적 함대와 대적하는 데 훨씬 유리하게 작용했다. 얕은 해안가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은 조선수군의 작전선(作戰線)과 밀접히 관련 있다. 바다가 시차를 두고 갯벌로도 변하는 전투 해안의 조건을 고려해 만든 것이다. 이 점에서 가장 완벽한 전투선이자, 적함대의 약점을 공략하는 목적성 전함인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장군은 거북선 건조 시 자라와 거북을 방안에 두고 3개월 동안 관찰한 것으로 알려진다. 자라나 거북의 배 밑이 평평한 것과 두 전함의 밑이 같은 구조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또 선체가 커서 화포나 총통 등 육중한 무기를 싣고 다니는 데 크게 유리했다. 여기에는 생물학적 지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은 오랫동안 집적된 선박 지식의 모든 특장점을 반영하고 있다. 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창선을 꽂고, 화약무기, 철갑판, 선수방패 등을 탑재함으로써 압도적 경쟁우위를 살렸다. 오랜 시간 누적된 조선 선박 지식의 집합체이자, 지식통섭의 결과다. 이처럼 거북선은 당대까지 내려온 조선의 모든 전함 기술을 혁신해낸 최고의 전함이었다. 이 점은 장군이 조선학분야에 매우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또 장군은 바닷물이 들고 나는 것을 정확히 관찰해 배의 구조를 설계했고, 또 전투 시 전략적 타이밍을 정확하게 계산해 적을 궤멸 상태로 몰아넣었다. 적을 몰아넣을 요로(要路)요구(要口)전략을 편 것은 핵심이 되는 길과 입구를 틀어막아 적을 멸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장군의 조력학적 지식 및 지리학’ , ‘해양학적 지식수준을 잘 드러내준다. 이 같은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한일 간 지식과 과학의 한판 승부이기도 했던 것이다.

 

거북선은 특정 목적을 위해 사용된 일종의 돌격선이다. 조선수군의 주력 군선인 판옥선을 혁신시킨 것이다. 적병이 배에 오르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날카로운 쇠못을 박아 보호막을 만들어 적의 화공과 활, 조총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게 설계됐다. 함미의 키 부분을 거의 수직으로 설계한 것도 적이 뛰어들지 못하게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적의 전법을 면밀히 꿰뚫고 만든 전략 함선이다. 꼬리부분이 이렇게 치켜 올라간 것은 유속 저항을 고려한 공학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배의 무게중심을 잡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적함의 전투 대열을 뚫고 들어가는 당파(撞破)능력은 건조 시 견고한 소나무 사용과 이음새에 있다. 이음새로는 박달나무나 전나무가 쓰여 물에 불을수록 외판을 더욱 견고하게 고정시켰다.

그렇다고 거북선의 임무가 당파 목적에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위주로 한 주력군이 전열을 흐트러뜨리면, 그 사이 적의 지휘부까지 신속히 돌격해 일거에 적장을 격살하는 참수공격을 위한 특수 군선 임무도 수행해 냈다. 지붕을 쇠로 덮어씌운 것은 적이 뛰어들게 하지 못하려는 목적과 함께, 적의 지휘관을 저격할 때 적군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막아주는 기능상 목적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작전 시 거북선이 돌격해서 적의 전열을 깨뜨리면 이어 판옥선이 집중공격을 가했다. 이 같은 주력함선 투톱(two top)전략으로 장군은 숫자상 중과부적인 왜군을 맞아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냈다.

 

거북선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내부구조다. 여기에도 숨은 혁신에의 노력이 십분 반영되어 있다. 배를 젓는 층과 전투를 하는 층을 분리시킴으로써 각각의 병사들은 어떤 방해도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이순신 귀선(龜船)1592년에는 3, 1595에는 5척에 이르는데, 원균을 통제사로 한 조선 함대가 정유재란(1597)때 칠천량에서 모두 궤멸될 때(715)함께 비극적인 운명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통제사에 재임명된 장군은 겨우 12, 13척의 패잔 전선을 거두어 명량해전에서 대승리를 한 후, 이듬해(1598)노량해전에 나섰다. 12개월 동안 거북선을 다시 건조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있다.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의 맹활약으로 발목을 잡힌 일본은 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전선(戰船)인 안택선을 혁신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안택선은 쇠못을 이음새로 쓴 탓에 녹이 슬기도 하고 배의 목재까지 부식시켰다. 또 조선 선박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견고하지 않아 거북 전함에 쉽게 당파되었다. 연안 해전을 염두에 두고 배를 건조하였더라면 혁신을 꾀할 수 있었을 테지만, 왜의 함선은 군사를 육지로 이동시키는 수단에 국한되었다. 용골을 U자형으로 만든 목적은 수송의 편리함과 안정성 그리고 병사들의 배멀미를 줄이려는 목적에서였다. 여기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육전에서의 성공 경험이 크게 작용한다. 육전에서 승리를 거둔 그에게 해전은 별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또한 일본 내부를 어떻게 해서든 안정화시키고자 군부의 힘을 조선에 집중시키고, 남아도는 병사들을 조선 땅에 쏟아 부으면 그만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존에 설정해 둔 함대 전략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만일 왜가 전선과 화포 혁신을 이끌어 냈다면 바다에서의 전투는 물론이거니와 전쟁 국면 자체도 달라졌을 것이다.

 

거북선을 만든 선소의 위치도 절묘하다. 임진왜란 당시 장군의 지휘 하에 건조된 세 척의 거북선은 여수 일대 각기 다른 선소에서 제작되었다. 전라좌수영 본영 앞의 선소, 돌산 방답진의 선소, 쌍봉 선소가 그 세 곳이다. 장군이 이렇게 각기 다른 선소에서 거북선을 제작케 한데 무슨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닐까? 여기에는 목재 등 자원 채취의 용이성, 동시다발적으로 거북선을 제작해야 할 급박성과 필요성, 진수 후 작전 투입의 적지성(適地性), 건조 지역의 제 조건, 프로젝트 관리상의 백업 기능 차원 등 여러 이유가 반영되어 있다. 일종에 제작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위험요인을 줄이고, 효과성을 높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프로젝트 관리상 백업 차원에서 거북선 제작의 골든 트라이앵글이라 할 수 있는 세 중추적 요충지에 선소를 마련했다. 이는 제작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위험요소를 줄이고, 효과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각기 다른 세 곳은 거북선 건조 후 작전 투입에 가장 적지(適地)로 인식되는 곳으로 각 선소들의 위치는 정확히 남해 바다를 향해 뻗은 진격형 삼각편대를 이루고 있다. 거북선 제작 골든 트라이앵글개념은 백업 장치였던 것이다. 참고: 전경일, 이순신 경제 전쟁에 승리하라

 

거북선 R&D 센터의 골든트라이앵글로 부를 수 있는 각 선소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본영 선소는 남해를 통한 경상도 해역 출격 거점으로, 방답진은 고흥반도와 순천만 일대를 포함한 전라 인근 해역 출격 거점으로, 쌍봉 선소는 만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두 선소를 지원하는 백업어(back upper)로써 기능했다. 한편 전라좌수군의 본영인 진남관은 위치상 본영은 시제품 개발 센터로 테스트 베드(test bed)역할을 수행하면서 실제로 해상전투용 거북선 건조의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방답진은 해상 최전방에 위치시킨 포스트 선소로 작동했으며, 쌍봉 선소는 가장 안쪽에 깊이에 위치시켜 제3 R&D 센터의 임무를 수행했다. 각 선소간 거리는 쌍봉-본영(7킬로미터), 본영-방답진(15킬로미터), 방답진-본영(17킬로미터)으로 이순신 거북선 R&D 센터는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 진격형 골든 트라이앵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을 분석해 보면, 장군은 지형학’, ‘설비입지학’, ‘시설 운영학등을 두루 고려해 거북선 제조의 대역사를 맡을 선소 입지를 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여수 선소마을은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든 곳인데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쌍봉 선소 굴강(屈江)에서 거북선을 만들고 대피시켰다. 굴강은 천연 해안 요새에 구축한 인공호로 썰물 때에는 물이 빠졌다가 밀물 때는 물이 차오른다. 장군이 만든 거북선은 물이 차오를 때를 기다렸다가 진수식을 거행하며 적을 무찌르기 위해 굴강을 박차고 저 먼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무결점의 승리를 가져 온 이순신 전략의 핵심은 다름 아닌 수학적 원리에 있다. 그것은 해상에서피타고라스 정리를 철저히 활용한 것이었다.

 

그림에서 성벽 위 A지점의 적을 향해 B지점에서 화살을 쏴서 적을 맞히기 위해서는 BC 지점간 거리가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 계산에 쓰인 원리가 바로 피타고라스 정리이다. 이 정리는 이순신 장군의 수전에 적극 활용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함포를 B, 왜군의 조총을 C, 해상에서의 아군과 적군의 거리를 a라 할 때, 장군은 B에서 방포하는 화포의 사거리가 C지점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그 거리를 계산해 포탄 도달거리를 계산해서 적용했다. 장군은 전략적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C를 적이 위치 지어져야 할 지점으로 설정하고 화포 유효사거리인 70미터에서 유효명중률 거리인 140미터 내에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유인책을 썼다. 승리의 원천에는 철저한 수학적 원리가 계산되어 있.

 

임란 시 사용한 화포를 살펴보면, 방포 사정거리가 천자총통은 1512미터, 지자총통은 2520미터, 현자총통은 2520미터, 황자총통은 1386미터에 미치고 있다. 실험 결과, 유효사거리를 70미터로 유지하면 매우 높은 명중률을 보였다. 유효 명중률 거리가 140미터이다. 반면 조총의 기본사거리는 100~200미터, 조총 유효사거리는 30~50미터이다. 양측 모두 가장 최상의 명중률을 보이는 사정거리를 기준으로 보자면, 이순신 함대(B)는 적(C)을 궤멸코자 화포사거리(c)를 계산해 아군은 조총의 유효사거리(50미터)밖에 있게 하고, 적은 화포 유효사거리(70미터)내에 포지셔닝 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따라서 적은 언제나 전투 시 아군에 의해 그 차이 지점인 20미터 내에 위치 지어져야 한다. 이것을 화포 유효명중률 거리인 140미터와 조총 기본사거리 100미터로 환산해 보면, 40미터이내가 적이 포지셔닝해야만 하는 바로 그 위치인 것이다. 한산도에 설치한 활터와 과녁과의 거리가 145미터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화포의 유효 명중거리를 반영해 해상에서 거리 감각을 익히도록 하기 위해 같은 거리를 설정하였던 것이다.

 

활터와 과녁의 거리인 145미터와 화포의 유효 명중률 거리 140미터 간 차이인 5미터는 무엇을 뜻할까? 해상에서 이 차이가 크진 않을 수 있지만, 이는 실제로 적을 사거리 내 두려는 착안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골프에서 홀컵을 지나는 공만이 반드시 들어가게 되어 있다(‘never up, never in’의 법칙)는 법칙처럼 말이다.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위력 면에서도 적선 앞에 떨어지는 포탄보다 적선 위를 바로 지나가 폭발하는 포탄이 심리적 압박감을 더 심어 줄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장군은 적의 핵심경쟁력인 조총의 비거리를 반영해, 가급적 적선을 아군의 화포 반경 내 두는 전략을 펼쳤다. 이것이 해전에서 아군 피해가 절대적으로 적었던 이유이고, 거의 110의 규모로 벌어지는 화포전에서도 승리를 거둔 이유이다.

 

나아가 청동 화포를 장착한 거북선이 적에게 완패를 안겨 줄 수 있었던 것은 ()시차 360도 경영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적의 조종 사격 방식이 1선에서 발사할 때 2, 3선은 장약을 채워 넣는 제사방식을 취했다면, 조선 수군은 이를 보다 정교하게 적용해 함포 발사 시 배를 리볼버 소총처럼 360회전시켜 가며 화포 사격을 가했다. 시차 없이 100퍼센트 효율성을 살리는 함포발사 프로세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나아가 왜군의 발사법이 흔들리는 바다전함사수조총이라는 불확실성의 요소가 네 개나 작용하고 있음에 반해, 거북선과 판옥선의 경우에는 움직이는 해상에서 배와 화포가 일치되어 불확실성의 요소를 두 개로 줄이며(50퍼센트로 불확실성이 줄어드는 것은 확실성 면에서는 100퍼센트나 늘어난 것을 뜻한다.) 상대적으로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처럼 화포사격시 무시차 경영은 이순신 장군의 지식 경영 일면을 잘 보여주는 예이자, 승리의 또 다른 원천인 것이다

 

장군이  행한  여러 창조적 전략들을 살펴보면, 임란 승리의 배경은 막하 병졸들과 필사즉생의 각오로 전투에 임한 것은 물론, 승리 조건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공학적 지식을 활용한 데 있다. 400년 전 왜적을 맞아 싸운 이순신 해전 승리의 원천은 지식 통섭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임진왜란은 지식 전쟁의 승리였다. 이 지식 전쟁은 오늘날 더욱 치열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장군을 여러 면에서 다시 보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로마의 길은 지금도 계속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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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길은 지금도 계속 달린다

 

영국 산업혁명 초기 대표적 기술자 중에 운하 건설자인 제임스 브린들리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 영지에서 산출되는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맨체스터까지 운하를 놓을 것을 계획한 브리지워터 공작(3rd Duke of Bridgewater)에게 고용되어 운하를 만든 장본인이다. 이 운하는 워슬리 산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공업도시 맨체스터로 석탄을 운반하는 토목 공사로 영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1759년까지 장거리 운하가 없었고, 도로 사정도 아주 나빴으며, 석탄과 그 밖의 물자는 말 등에 실어 운반했었다. 동물의 등짐을 빌은 석탄 수송은 효율성이 너무 낮아 나날이 발전하는 공업 분야의 석탄 수요에 부응할 수 없었다. 이를 대체할 뭔가 획기적인 방안이 요구되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골몰하던 중 공작은 여행 중에 우연히 그 묘책을 찾아냈다. 남부 프랑스에서 100년 전에 건설된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랑그도크 운하를 본 것이다. 그 순간 그는 힘겨운 석탄수송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즉시 공사를 맡을 적임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고용한 기술자 브린들리는 단순 기계 수리공에 불과했다. 선박 항행이 가능한 운하를 본 적도 없고, 운하 건설에 관한 지식도 전무했다. 그럼에도 그는 공작이 전해준 대운하에 관한 정보 하나로 이 야심찬 계획에 뛰어들었다.

 

브린들리는 탄광과 맨체스터 사이의 드넓은 전원 지대를 관찰하고 나서 운하건설에 결정적인 두 가지 핵심 사항을 파악했다. 하나는, 운하는 강이나 어떠한 물줄기에도 연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기에 범람해 들어오는 강물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 조건은 필수적이었다. 두 번째 요소는, 동일한 수평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저지나 고지에 수문을 만들지 않고 운행할 수 있다.

착상은 훌륭했지만, 쉽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맨체스터까지 운하를 관통시키는 데에는 어웰 강과 험한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한 것이다. 난관에 부딪쳐 그는 획기적인 설계안을 그렸다. 바로 강과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아치형 석조 수로교(水路橋)를 가설한 것이다. 길이 약 180미터, 폭 약 11미터, 높이 약 12미터의 대형 구조물이었다. 이렇게 공사를 하면 운하가 강의 수면까지 가닿고 다시 골짜기 높이까지 끌어 올리는데 수문이 필요 없어지게 된다. 착상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브린들리가 제안한 수로교 컨셉이 새로운 아이디어만은 아니다. 이미 2000년 전에 로마인들은 상수도용 수로교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박 항행용 수로교는 그때까지 영국에선 듣도 보도 못한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다른 기술자들과 일반 영국인은 다들 돌았다며 수군거리고 비아냥댔지만, 공작만은 브린들리의 건설안에 감동을 받아 적극 지원했다. 이에 고무된 브린들리는 자기의 확고한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1761년 운하는 마침내 개통되었다. 건설된 수로교의 외형은 아래쪽 강은 배가 왕래하고 그 위에 공중에 뜬 수로로는 석탄을 실은 운반선이 말이나 노새에 끌려 움직이는 식이었다. 누가 봐도 가히 ‘18세기의 경이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1761년 브린들리가 개통한 고가식(高架式)수도교가 착상을 남프랑스의 랑그도크 운하에서 찾은 것이라고 해도 그 원형은 세계 제국을 이룬 로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B.C.312, 로마의 기술자들은 제국의 수도에 식수를 공급하는 수도 건설을 위해 누구도 이전에 감히 상상치 못했던 대규모 건설공사를 시작했다. 문명생활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 무렵 로마 수로는 9개가 구축되었고, 총연장이 400킬로미터나 되었다. 수로를 건설한 사람의 이름을 따 아피아 수로라고 불렸다. 그 뒤로도 대규모 공사는 계속돼 A.D.226년에는 마침내 11개의 수도교를 통해 매일 약 98800만 리터의 물이 공급되었다. 그 물은 로마에 사는 100만 시민의 급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었다. 로마의 목욕탕과 주방까지 공급된 물은 48킬로미터나 떨어진 야산 위의 수원지로부터 흘러나와 수로와 도관(導管)을 따라서 로마 평야 지점까지 운반된다. 그 뒤 여기서부터 생겨난 수압으로 다시 시내 곳곳에까지 일률적인 경사를 지닌 아치형 돌다리를 따라 연관(鉛管)이나 토관을 타고 집집마다 공급되었다.

 

      

  

(왼쪽)제임스 브린들 리가 설계하고 건설한 수로교(水路橋). 영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대운하이다. 건설 당시 다른 기술자들은 하늘에다 수로를 띄우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비아냥댔으나 브린들리는 수로교를 만들어 냈고, 당시 열악한 방수 기술 하에서 찰흙에 모래를 썩은 방수성 재료를 사용해 누수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오른쪽) 로마 근교의 가르의 다리는 로마 공학의 일대 성과로 수도교 위에 다시 다른 수도교가 걸려 있다. 실용성을 더한 까닭이다. 당시 로마의 기술자들은 A.D.52년에 완성한 클로디안 수도교의 상부를 이용해 아니오 노부스 수도를 통하게 하려고 했다. 오늘날까지도 전체적인 형태나 3단식 아치의 원형이 거의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 이 수로교는 B.C.19년 프랑스의 님요새(要塞)에 급수를 하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가르강 위의 높이 45미터를 떠받치고 있다. 이 수도로 산의 수원에서 로마로 하루에 19만 킬로리터의 물이 공급되었다.

 

 

로마에서 수로교 원리를 가져왔듯 세계 각국의 도로 또한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 각국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는 약 2500년 동안 쌓인 도로 공학의 산 경험장이었다. 그 원형은 로마의 도로에 있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인,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등으로부터 도로공학 기술을 물려받아 이를 완성시켰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2200년 동안 도로는 제국의 동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로마공화정 초기 로마에서 외부로 통하는 데에는 네 가지 종류의 길이 있었다. 각도로는 폭이 30센티미터인 작은 것에서부터 2.4미터 크기의 국도까지 다양했다. 그러다 B.C.312년이 되면 도로 폭은 3.6미터 3차선 간선도로로 발전한다. 이 길을 따라 로마군단은 멀리 그리스, 소아시아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점점 로마제국이 강대해짐에 따라 도로는 더욱 연장되었고 폭도 넓어졌다. 기원후 2세기에는 29개의 당당한 군용도로를 포함한 총계 86336킬로미터에 걸쳐 도로가 개설되었다. 로마인의 마차는 멀리 영국에서 소아시아까지 뻗쳤다. “로마의 도로가 유럽을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길은 로마 대광장의 황금 이정표로부터 거리가 측정되었다. 그 중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부설시킨 폼페이의 도로는 적 침입 시 군대를 신속히 국경으로 움직이기 위해 부설된 것이었다. 또한 그 길은 상업과 통신을 d이어주는 경제의 길, ()의 혈관이기도 했다.

  

 

 

고대 로마제국이 수백 년에 걸쳐 건설한 유럽 간선도로는 기원 후 2세기경에는 유럽 전토,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까지 뒤덮는 8만 킬로미터의 장대한 도로망이 된다. 이 길은 지중해를 일주하고 전 유럽을 에워싸고 있다. 실핏줄 같이 얽히고설킨 이 도로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대부분 군용도로로 건설된 것이지만, 나중에는 수송과 상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제국이 몰락한 후에도 로마문화는 그대로 남았다. 나아가 로마식 도로공학은 훗날 전 세계 도로 건설의 표준이 되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토목기술, 축성술, 공공건물 건축법 등 건축 공학의 전서격인 저서 건축10권을 남겼는데, 첫 권에서 밝힌 건축술의 3원칙인 강도(firmitas), 편리함(utilitas), 아름다움(venustas)은 변함없는 토목건축 지침으로 쓰이고 있다. 제국을 이룩했던 오래 전 원형 지식이 살아남아 인류의 생활에 계속 영향을 마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인은 제국이 영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도로는 세심한 주의 하에 포장되었고, 말이 달리기 편하도록 경사를 줄였다. 또한 모든 길은 지형이 허용하는 한 직선으로 뻗게 했다. 이를 위해 다리를 놓거나 제방을 쌓았고 산을 깎고 터널을 뚫기도 했다. 로마의 기술자들은 또한 흙이나 잔돌, 또는 부순 바위를 표면을 두 겹으로 깔아 노상을 받쳐주었다. 부순 돌이나 자갈을 깐 길 표면은 배수를 위해 약간 경사지게 해놓았다. 도로 부설 시에는 기초를 2.4미터나 깊이 파서 낮은 운하처럼 만들고 그 위에 모르타르로 접합한 주먹 크기의 돌을 넣고 두께 30센티미터 정도로 다진 다음 쇄석(碎石)모래석회화산토로 만든 콘크리트를 30~35센티미터 채워서 굳혔다. 이런 하부 구조 위에 현무암과 같은 석판석괴(石塊)를 깔았다. 그리고 도로 측면에는 배수구를 만들었다. 이것이 로마 시대 간선 도로의 표준이었다. 이것은 약 60센티미터 밖에 파지 않는 오늘날 도로에 비하면 훨씬 내구성이 뛰어난 것이었다. 도로는 기동력을 가져다주었고, 로마의 법률, 상품, 사상은 전 서유럽 사회로 뻗어나가 5400만 사람들에게 미쳤다. 길을 놓는 민족만이 성()하다는 것을 입증해 낸 것이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도로는 끊기고 방기된 채 16세기에까지 이른다. 유럽의 도로는 대개 18세기말까지 답보 상태에 있었다. 이 상태를 깬 이가 스코틀랜드의 귀족 존 라우든 매캐덤이었다. 그는 브리스톨 시()의 전임 조사관으로 임명되어, 235킬로미터에 달하는 짐마차 도로와 주도(州道)를 유지하고 복구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가 도로 건설에 나서게 된 것은 사업상 필요에서였다. 영국 서해안의 해군기지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선 도로 개선이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그는 이를 개선하고자 15년에 걸쳐 틈틈이 종래의 도로 건설법을 연구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이 로마식 도로였다.

 

이 내구성이 뛰어난 도로는 1.2미터의 하층부 위에 다시 큰 돌을 놓은 것이었다. 시공법을 세분해 보면, 찰흙이나 회반죽 속에 돌 블록을 2층으로 깔아 튼튼하게 기초를 다지고, 다시 자갈과 모래를 겹치고, 마지막에 회반죽을 이용해 포장용 돌을 굳힌다. 그는 로마 도로를 자세히 조사해 자신만의 간단한 도로건설법을 만드는데, 이 방식은 직접 차량의 중량이 노반에 걸리도록 한 것이었다. 노반은 탈것에 의해 굳혀진 하나의 자갈층으로 포장되어, 노반의 건조 상태를 유지하게끔 되어 있었다. 현대의 도로부설도 이 같은 매캐덤 법을 본뜨고 있다. 오늘날 매캐덤 법은 전 세계 도로 건설의 기본법이 되고 있다. 현대의 도로가 그 옛날과 다른 점은 표면 처리를 해 불침투성을 높인 점뿐이다. 그렇지만 근본 원리는 옛날 로마 도로와 같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원형(原形)모델이라는 학술용어가 쓰인다. 도로 공법은 로마의 길에서 원형을 가져온 것이다. 인류가 쌓아 온 원지식(源知識)이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 기초가 되는 지식을 잘 캐서 반짝거리게 하면 쓸 수 있는 곳은 무한하다. 로마의 수로교는 목마른 자의 목을 축여 주었고, 그 길은 이후 유럽의 침략사와 문명 및 인도주의라는 상반된 등불을 밝혀 주는데 쓰였다. 인류사의 주요 순간에 민중들을 혁명의 광장으로 이끌어주기도 했다. 길은 놓여 있고, 우리는 쉼 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 서 있다. 어느 길속에서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어떤 역사를 선택할 것인가 만큼이나 크다. 모든 선택의 문제는 길과 함께 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터키에서는 피자, 유럽에선 파스타, 한국에서는 ‘3천년 빵’을 먹어야하는 특별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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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는 피자, 유럽에선 파스타, 한국에서는 ‘3천년 빵을 먹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

 

밀은 벼과 밀속에 속하는 1년생 초본으로 현재 23종이 재배되거나 야생종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곳곳의 다양한 지역 음식은 왜 돌아와서 먹어보면 현지 맛과 다를까? 특정 음식은 왜 해당 지역에 가서 먹을 때라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세계 어디서건 먹을 수 있지만 터키에서는 피자를, 유럽에서는 스파게티를, 한국에서는 3천년 빵을 먹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 같은 것 말이다. 이 답을 찾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야생을 누비다 우리 곁에 와서 길들여진 밀(소맥小麥, wheat) 품종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밀속()에 대한 세포유전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30년대 무렵부터였다. 그 당시 주된 관심은 종간(種間)잡종 연구였다. 복잡한 유전체 연구는 옆으로 치워두고라도 이 같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트란스코카사스(아제르바이잔과 코카사스산맥 지역)와 터키, 이라크 및 이들 주변 지역에는 2배종의 밀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 밀은 1립계 밀(염색체의 수가 14)인 트리티컴 보이오티컴(Triticum boeoticum)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밀은 야생밀로 구석기 유적에서도 발굴되는데 주로 선사시대 주민들에 의해 채집되어 식용되었고, 가장 오래 전부터 인류가 재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종자는 대체로 청동기 시대 이후로는 재배가 줄기 시작해 오늘날에는 거의 재배되고 있지 않다. 일종에 유적이 된 종자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건강식품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재발견되었다.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빵밀도 이 야생밀로부터 유전적으로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그 사이 이 야생밀 종자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이 밀 종자는 그 후 사람과 가축이 이동하는 것과 함께 옮겨졌고, 새로운 풍토에서 새로운 야생종과 만나 새로운 살림을 꾸렸다. 잡종 교배가 모든 밀 종자에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 밀 품종을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격렬한 사랑으로 태어난 자식들은 예전보다 가축과 인간의 입에 더 잘 맞게 유전적 성질이 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인간 속에서 인간과 함께 하는 가장 친숙한 곡물로 남게 되었다. 지역마다 다른 밀 품종은 다른 입맛을 가져왔고, 그에 맞는 음식, 요리 문화를 가져왔다

 

야생종과 재배종의 중간 종자인 이 밀로 만든 최고의 음식은 터키에서는 피자다. 이 밀 종자를 갈아 피자를 구우면 밀가루 본래의 본토박이 피자 맛이 난다. 지금도 터키에서는 불에 구운 부풀지 않는 납작한 피자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 특유의 밀을 이용하고 있다. 만약 운 좋게도 터키의 바자르(시장)나 레스토랑에 가게 된다면 피자의 사촌뻘인 라와시와 케밥부터 주문할 일이다. 그곳 특유의 밀로 만든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유럽 쪽으로 건너가면 토핑(topping)을 한 피자가 유행한다. 그것은 야생이 사라지고 난 뒤 덕지덕지 개칠되고 덧붙여진 유럽식 식문화의 상징이다. 그러고 보면 유럽문화라는 것은 대부분 무엇을 덧얹어 만들어 진 것들이다. 그리스의 헬레니즘이 기독교의 헤브라이즘의 원형이 되었듯이. 기독교인들은 천상과 지상의 모든 신들을 상상과 폭력적 방법으로 하나로 통합해 냈을 때 짜릿함을 맛보았을까?

 

이와 다른 밀속 종자로는 원시적 재배종인 야생 2립계 밀 트리티컴 디코쿰(Triticum dicoccum)이 있다. 이 종자는 신석기 시대부터 1년에 평균 5킬로미터 속도로 진군해 지중해 연안 및 중부 유럽에까지 전파되었다. 에티오피아, 모로코 등 아프리카 지역과 이란, 코카사스, 아라비아, 인도 등 아시아 지역, 스페인, 중부유럽,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발칸반도 및 불가지방 같은 유럽 지역에서 오랫동안 재배되었다. 주재배지는 중동이라 부르는 근동(近東)지역이다. 이 종자는 고대에는 광범위하게 재배되었지만, 지금은 유럽과 아시아 산악지역에서 재배되어 언필칭 유적이 되어버린 곡물이 됐다. 그럼에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종자의 가치는 끈질긴 생명력에 있다. 어떤 열악한 토양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는다. 병충해에 강한 장점도 있다. 이 종자는 미국은 물론, 모로코, 스페인(서북부 아스투리아스 지역)과 체코와 슬로바이아의 국경 지대인 카르파티아 산맥의 산악지대와 알바니아, 터키, 스위스,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서 자란다. 미국에서도 특별한 농산물로 재배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이 밀을 이용해 전통음식을 만든다. 특이한 점은 이탈리아에서는 이 종자를 잘 관리해 재배 지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는 점이다. 가페가나 지역에서는 파로(farro)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법적으로 재배 지역은 보호받고 있다. 이 파로는 건강식품으로 유럽 전역의 상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고 영국의 슈퍼마켓에 들르면 선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종자는 주로 사람들의 음식으로 쓰이지만, 가축 사료용으로도 쓰인다. 사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영양가나 섬유질을 필요로 하는 면에서는 대체로 같다. 우리는 바다를 건너 온 같은 포유류들이다.

 

이 밀은 맛은 물론 섬유질 면에서도 훌륭한 빵을 만드는 데 쓰인다. 스위스를 비롯해 이탈리아 등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른 종자보다 섬유질이 길어 특히 파스타를 만드는데 쓰인다. 최근에는 건강식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 종자의 특색이라면 그 후 돌연변이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16세기 이후 마카로니 밀(T. durum)이 여기서 나왔고, 온대 건조 기후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 지금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재배되는 밀이 되었다. 지중해연안 지역에는 특별히 마카로니나 스파게티가 발달해 있는데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이 밀 종자 때문이다. 이 밀은 부질(gluten, 빵의 골격을 이루는 단백질로 빵을 부풀게 하고 끈적거리게 하는 성질. 밀가루 음식이 소화가 잘 안 된다는 통념은 일반적으로 그루틴 때문이다. 현재 식품업계에서는 그루틴 안전(Gluten Free)’ 식품을 만들기도 한다.)이 풍부하고 경질성을 띠어 두 음식의 원료로서 적합하다. 지중해 나라들에 가서 마카로니나 스파게티를 찾아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밀 종자의 변천사는 조만간 전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인간에 의해 식용되는 종자로 진화한다. 지도를 펼쳐보면 밀 종자의 확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다루는 가장 범용적인 종자는 지도에서 보듯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 퍼져 그야말로 세계제국을 형성하고 있다. 어딜 봐도 이 종자뿐이다. 진화와 적응의 과정에서 보여준 승자의 궤적이자, 우리 입과 위장은 물론 소화기관도 이 종자와 관련 맺고 있다.

  

 

 

 

 

 

 

 

 

 

 

 

 

 

 

밀 종자 중 하나인 트리티컴 아에스티붐(Triticum aestivum)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넓게 분포해 있는 종자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풍토에 잘 적응한 앉은뱅이 밀도 지난 100년간 종자 면에서 달라진 건 없다. 이건 우리 입맛과 체질이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같은 T. 에스티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수입 밀을 먹고 있다. 한국은 전체 곡물 자급도가 단지 27퍼센트에 불과한 농업 취약 국가다. 특히 밀은 국내 산출량이 극소해 생산량도 연간 4만여 톤에 불과하고 자급률도 0.2퍼센트에 불과하다. 같은 종일지라도 생산지의 환경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것은 틀림없다. 우리 입은 수입 밀로 만든 음식에 이미 익숙해 질 때로 익숙해져 있는 상태다. Source: Triticum aestivum distribution map. Data from Global Biodiversity Information Facility (GBIF) &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 & http://agris.fao.org/agris-search. 

 

  

 

빵밀인 트리티컴 아에스티붐 L(Triticum aestivum L.)은 오랜 세월 돌연변이와 수많은 야생 밀과 자연스럽게 유전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진 종자로 우리가 매일 먹는 종자도 바로 이것이다. 기원전 7000년 전 유로-아시아 지역에서 재배되었으며, 다양한 야생 종자가 채집된 뒤 식용 목적으로 재배되었다. 이 종자는 오늘날 제빵업에서 확고히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그림은 야생 밀의 유전자 결합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Source: Picture by Kalda, M., MPIZ. Text by Dr. Wolfgang Schuchert.

 

 

빵을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빵밀의 경우는 어떨까?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빵을 만드는데 최적격인 빵밀인 트리티컴 아에스티붐(Triticum aestivum)은 한대에서 열대로, 건조지에서 습윤지로 폭넓게 적응하며 생태적 분화를 이루어냈다. 그 결과 세계 구석구석에서 재배되는 세계적인 밀이 되었다. 빵이 전 세계 곳곳에서 애용되는 식품이 된 것은 밀이 냉온을 가리지 않고 지배에 적응해 왔기 때문이다. 이 종자는 기원전 5천년~4천년 경 서남아시아와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의 도나우강과 라인강 유역에 이르렀고, 흑해의 서해안 전역과 남러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이어 기원전 3천년 경에는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같은 시기 아라비아를 거쳐 아프리카로 전파되었고,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1천년 뒤에는 인도와 중앙아시아로, 그 후 기원전 2천년 경에는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에 전파된 이 종자는 음식 문화의 변화를 가져와 밀가루로 가공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그 뒤 가루음식이 잇따라 개발되고 수요가 급증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만두, , 국수, 심포자, 교자 등 다양한 밀가루 음식은 이런 사실을 잘 밑받침해주고 있다. 밀은 심지 않은 곳이 없었고, 면은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중국인들은 밀을 이용해 삶고 찌고 굽고 튀기는 방법으로 다양한 요리를 개발해 냈다. 굽는 방법으로 발효법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중국식 빵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밀 종자는 기원전 1천년 경이 되면 한반도에까지 건너오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3천 년 전이다. 따져보면 우리가 빵밀을 먹은 것이 대략 3천년이나 되는 것이다. 실로 장구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손과 짐, 그리고 가축의 털과 위장에 붙어 밀 종자는 끊임없이 이동을 거듭하다가 한반도에까지 들어 와 정착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수천 년 간 밀은 우리와 더불어 재배되어 왔다.

 

그런데 이 유구한 종자가 불과 30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처하는데, 그 주요 요인은 한국 정부의 정책 때문이었다. 수입자유화와 1984년에 시행된 정부의 수매 중단 정책이 직격탄이었다. 우리 손으로 우리 종자를 죽이고 수입 밀을 들여다 우리 식탁에 쏟아 부었다. 이때 우리 밀 말살 정책에 적극 가담한 측은 대한민국 정부와 제빵 및 제분업계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이었다. 정부는 개방이란 이름으로, 대기업은 보다 높은 이윤추구를 이유로 이 말살의 선두에 섰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 들어 죽어가던 우리밀이 가까스로 근거리 먹거리와 우리 식재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되살아나고 있다. 그럼에도 년 간 생산량은 단 4만여 톤에 불과하다. “강나루 건너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는 이제는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다. 밀이 위기면 우리 먹거리도 위기고, 우리가 각자 하나씩 꿰찬 위장이나 장기(臟器)조차도 위기다. 유전자 조작과 방부제에 절은 수입 밀수입도 문제지만, 다른 밀속에 해당되는 종자가 맺은 곡분으로 빵을 만들어 먹을 때 제 맛을 느끼기도 어렵다. 미세한 맛 차이라도 그 차이는 식문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풍속도 바꾼다. 터키에서는 피자를, 유럽에서는 파스타나 마카로니를, 한국에서는 우리의 ‘3천년 빵을 먹어야 할 이유는 뚜렷하다. 이 땅이 우리 거라는  주장을 하려면 여기서 자라는 것들과 무관한 듯이 행동하는 오만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탐욕에 눈이 멀어 우리 것을 말살하는데 나서고 있다. 우리 밀로 빚은 우리 빵 한 조각을  매일 식탁에서 만나고 싶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바람이 불려면 어딘가에 반드시 무풍대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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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려면 어딘가에 반드시 무풍대가 있어야 한다

 

 

지리학자들에 의하면, 태양 광선은 지구의 전 표면을 동일하게 덥히지 않는다. 지표면의 복사열도 어디서든 같은 게 아니다. 태양 광선은 적도지역에서는 지표에 거의 수직으로 비추지만 극에 가까운 곳에서는 비스듬히 비춘다. 때문에 적도의 공기는 극의 공기보다 당연히 덥다. 대기를 열기관으로 하여 바람을 불게 하는 것은 이 온도차다. 만약 지구가 자전하지 않는다면, 적도 부근의 더운 공기는 계속 상승하여 극 쪽으로 흐르고 극의 찬 공기는 밑으로 가라앉아 적도 쪽으로 흐르는 끝없는 공기 순환만이 규칙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그러나 지구는 돌고 있고, 태양이 비추는 지표면도 언제나 똑같지는 않다. 공기의 순환 원리는 이렇게 만들어 진다. 이 같은 원리에 따라 태풍 같은 초대형 대류 현상이 생겨난다.

 

태풍의 특이한 점은 어떤 것이든 회전한다는 점이다. 태풍이 회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중심의 공기는 가볍고 기압은 낮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공기는 무거우며 기압은 높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무거운 공기는 중심을 향해 흐른다. 지구의 자전으로 편향(偏向)되는 내향성 기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을 코리올리 효과라고 부른다. 그 반대의 경우는, 기압이 높고 짙은 공기 덩어리 주변에 생겨서 공기의 흐름이 중심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경우다. 이 회전운동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소용돌이도 반대가 된다. 지구의 자전은 태풍 속에 흘러드는 바람을 북반구에서는 오른쪽으로 쏠리며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게 하고, 남반구에선 왼쪽으로 쏠리며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게 한다.

 

태풍이나 허리케인 같은 초대형 풍우는 처음에는 열대 해상의 저기압 지대에서 형성된다. 수분을 머금은 따뜻한 공기가 이 지대에 흘러들어 그 속에서 상승한다. 따뜻한 공기가 상승하는 속에서 수증기는 다량의 열을 방출하고 그 열이 상승 속도를 한층 높여 비구름을 만든다. 그 힘은 가공할 만해서 태풍 하나는 대양과 공기에서 매초 25만 톤의 물을 흡수하며 응결하는 과정에서도 13000메가톤의 핵폭발에 해당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

 

뜨거워진 공기는 속도를 높이면서 상승을 계속하기 때문에 당연히 새로운 공기가 속도를 더하며 태풍의 중심으로 모여든다. 초속 90미터나 되는 바람이 발생하는 방식이다. 이 점에서 보면 해양이야말로 태풍의 에너지원()인 셈이다. 수리학자(水理學者)들에 의하면, 대기는 태풍과 태양 광선을 이용해 년 간 약 505천 세제곱 킬로미터의 물을 바다와 육지에서 빨아올린다. 그 중 바다에서 빨아올리는 물은 전체의 약 86퍼센트인 434천세제곱 킬로미터에 해당된다. 이 거대한 증발 과정에서 위로 올라간 수분은 다시 비가 되어 내린다. 시인 월트 휘트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물은) 육지에서, 한없이 깊은 바다에서, 영원히 남 몰래 하늘로 올라가, 거기서 얽혀 모여 완전히 변모한다.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내려서 가뭄과 미생물과 지구의 먼지 층을 씻어준다. 그리하여 길이 주야로, 자신의 본원으로, 생명을 돌려주고, 맑고 아름답게 해준다. ······누가 보든 안보든 간에.”

 

 

태풍은 어느 태풍이나 그 중심에는 직경 수 킬로미터의 조용한 구역이 있다. 이것을 가리켜 태풍의 눈[]이라고 한다. 눈을 에워싸고 있는 것은 큰 비를 내리게 하는 두꺼운 구름 고리다. 이 고리 속에서 바람은 맹렬하게 불고 풍속은 수 킬로미터나 움직인다. 이 눈은 태풍의 중심이자 하나의 부동점이 된다.

 

이 같은 부동점은 지리상에도 나타난다.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나 남위 5~6도 내 자리 잡은 지역은 기온이 매우 높고 비가 많이 내리는 열대 우림 기후대 또는 적도 저압대 지역에 속한다. 이곳은 북동 무역풍과 남동 무역풍이 마주치는 무풍대이다.

 

흥미로운 점은, 지구상 모든 바람이 여기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일테면 모든 바람이 시작되는 바람의 고향인 셈. 이를 가리켜 적도무풍(赤道無風, equatorial calms)라고 부른다. 바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 바람이 만들어 진다? 이런 역설이 나로선 신기하기만 하다. 반면, 아열대 무풍대 같은 경우엔 북위나 남위 23.5~28도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거의 항상 고기압 대에 속해 바람도 약하게 불고 비도 거의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지도를 펼쳐보면 대체로 사막 지대가 많다.

 

바람이 없는 곳에서 바람이 이는 점은 인체의 구조나 성운(星雲)모양과도 비슷하다. 이와 같은 현상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소용돌이다. 소용돌이는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생겨나는 것일까?     

       ()                      ()                               ()                            ()

머리 가마()나 태풍()이나 모두 소용돌이 모양으로 회전하고 있다. 태풍은 눈과 함께 거대한 구름 벽이 소용돌이치며 중심을 향해 와동혈(渦動穴) 형태로 빨려 들어간다. 전체적인 힘은 소멸 시까지 형태를 유지하며 이동한다. 격심한 바람과 폭포 같은 빗속을 뚫고 들어간 태풍의 소용돌이 안은 너무나 잔잔해 그 안에는 산들바람이 불고 태양이나 별도 떠 있다. 그러나 그 밖은 바다의 신인 넵튠이 한창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기상을 좌우하는 공기의 소용돌이 같은 모양은 ()처럼 은하계의 성운(星雲)에서도 찾아진다.

 

 

부동점 정리에 의하면, 원반()의 검은 점 주변의 모든 점들은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하면서도 규칙적으로 원반 테두리 쪽을 향해 방사상으로 이동해도 검은 점은 움직이지 않는다. ()처럼 머리카락이 방사상으로 자라고 그 소용돌이 모양 속에 가마라고 하는 부동점이 있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가마의 위치는 언제나 그대로 있고 머리카락만 일정한 규칙 하에 뻗는다. 이런 현상은 태풍의 모양()에서도 찾아진다. 또 은하계의 성운들의 밀집 대형()에서도 찾아지며, 심지어는 일상생활에서 세면대의 물이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는 데에서도 찾아진다. 이런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움직이지 않는 이 있다. 이것이 모든 운동의 소구점이다. 이 점을 중심으로 어느 특정 세계가 돌아가는 것이다. 지리적으로는 적도무풍대인 5~6도나 아열대 무풍대인 23.5~28도가 이 점에 해당된다. 이곳은 바람이 불지는 않지만, 지구 전체를 냉각시키거나 순환시키는 거대한 원리가 작동하는 매우 신비한 곳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지구 표면의 도처에서 동시에 바람이 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바람이 불려면 반드시 어딘가에는 무풍대가 있어야만 한다.

 

자연 속에서 찾아지는 부동점은 세련된 원형 구조를 하고 있는 왕거미의 집 중앙에 집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지그재그 모양의 거미줄에서도 찾아진다. 거미줄의 팽팽한 구조는 이 중앙의 얼기설기 엮은 부동점 구조에서 나온다. 다시 휘트먼에 의하면,

 

 

거미는 (조용히 참을 성 있게) 광막히 퍼진 공간을 탐색하느라 스스로 체내에서 가느다란 실을 자꾸 쉼 없이 뽑아내고 있다. ······무한한 공간에 홀로 둘러싸여 쉼 없이 생각하며 단행하며 실을 던지며 연결할 천체(天體)를 찾고 있다. 마침내 요긴한 다리가 놓이고 부드러운 닻[()]이 내려질 때까지.”

 

 

이것은 실은 거미의 생태를 얘기하려기보다는 우주의 어딘가에 걸리기를 희망하는 우리들의 영혼이기도 하다.

   

    

 

 

 

 

   

 

 

 

 

자연에 나타나는 다양한 장치, 기능, 현상에서도 소구점과 부동점 원리는 찾아진다. 힘이 시작되는 곳이나, 균형을 잡아주는 곳, 혹은 강력한 생성 몰입 동기를 지니고 있는 곳에서 이런 현상들은 주로 발견된다. 모든 원초적 힘과 욕망은 한 점에서 시작되고 귀결된다. 수렴화 과정을 거친 모든 현상이 끝내 향하는 곳은 소멸을 향한 지점이다. 이런 원리는 사회적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에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꽃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꽃의 중심부 주변에는 밀표(密標)라고 하는 유별나게 돋보이는 황색 별 표식이 있다. 꿀과 화분이 담긴 중심부로 가루받이를 하기 위해 이곳을 통해 꽃은 곤충을 유인한다. 제비꽃을 살펴보면 일련의 선이 중심부를 향해 모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곤충들은 이 선을 따라 중심부로 들어가고, 디키탈리스 같은 꽃은 꽃 가장자리에 큼지막한 점이 박혀 있어 중앙부로 유도해 들어가게 도와준다. 꽃의 이런 구조는 활주로에 박은 비행기 점멸 유도선과도 같다. 인간 사회의 원리에 빗대어보자면, 군대 계급에서 장교나 장성의 계급 표식에 무궁화나 별을 달아 끌리게 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수분자를 끌어들이는 꽃의 밀표처럼 부동점을 내부에 갖고 있어 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사람들에게 뚜렷한 징표가 되어 준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꽃을 찾는 꿀벌과 별로 차이 없어 보인다.

 

머리가마-태풍-성운에 보이는 부동점과 거미줄-꽃에서 찾아지는 부동점 원리를 우리 조직 원리에 빗대어 보면 어떤가?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수많은 조직에서 벌어지는 혁신은 그 자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비혁신적 요소(즉 무풍대)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혁신의 대상이 역으로 혁신을 유발한다. 또한 모든 혁신은 내부 요인이 궁극적으로 변화의 중심이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내부 무풍대는 외부를 움직이게 하는 핵심 요소다. 어떤 조직이 내부로부터 개혁을 잉태할 경우에도 힘이 작용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 당연히 부동점 내지 소구점은 변화를 잉태하는 하나의 기점이다. 이 특정한 점, 또는 대()는 넓은 의미로 주변을 변화시키는 활력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그런데사람의 머리 가마는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 단순히 머리를 잘 빗어 넘기기 위해 필요했던 것일까? 발생학적으로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 점은 좀 더 파고들어야 할 문제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대부분 사람들은 가마가 1개인데, 2개나 3개 또는 그 이상일 경우에는 어느 방향으로 빗질하는 게 좋을까? 이런 특수한 경우라면 유능한 이발사를 믿는 방법 밖에는 없다. 만약 우리 동네 이발소에 뭔가 남다른 혁신을 꾀하는 이발사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런 골치 아픈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게 틀림없다. 최소한 머리카락이 없는 군사 반란의 수괴자를 상대해야 했던 암울했던 시기의 어떤 이발사가 처한 처지와는 다를 테니 말이다. 헌데 지금 전개되는 상황이 그때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아 걱정이다. 어쩌면 남반구에서 부는 태풍도 오른쪽으로 돌고 있다고 진술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북반구에 살며 우선(右旋)하는 태풍만을 상대해서 극히 다행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인문경영은 조직원 단합과 기업성장의 밑거름”■ 인터뷰 -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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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들은 세계화·개방화로 세계 각지에서 밀려드는 값싸고 질 좋은 농식품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있다. 이에 우리 농업인들은 개방화의 급류가 소용돌이치는 거센 위협 앞에서 농업경영전략을 새롭게 짜야한다. 부가소득 극대화를 위한 6차산업에 적극 참여해 경영쇄신을 위한 힘찬 동력을 일으켜야 한다. 경영리더들이 갖춰야 할 인문경영 방법 발굴과 연구, 지역강연, 저술, 상담 등에 힘을 쏟고 있는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을 만나 인문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동양의 원천가치 철학인 인의예지신
잘 지키면 품질개선과 이익 자동창출

자금 없어도 조직원 혁신아이디어
잘 모으면 기업성장 가능해

 

  
 

 

인문학에는 선인들이 찾아낸
넓고 깊은 경영전략 깃들어


“이 시대에 인문경영은 매우 중요합니다. 유명을 달리했지만 스티브잡스를 비롯한 세계 경영리더들은 첨단과학시대에 살면서 구시대 인문학으로부터 경영기법을 찾기에 혈안이 돼 있습니다. 인문학에는 선인(先人)들이 찾아낸 넓고 깊은 삶의 지혜, 미래까지 계속 이어갈 귀중한 경영전략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경일 소장은 농업인들도 인문학에서 얻게 되는 창조혁신의 인문경영방법을 최대한 활용해 한국농업의 힘찬 발전을 이끄는 주역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의 우물을 끌어다 내 집 우물처럼 쓴다’는 통섭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경영을 어떻게 도입해 활용해야 하는지 알아봤다.
“먼저 가족경영 또는 주민협업기업을 설립하고, 중단기 매출목표를 잘 설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성원 각자의 담당업무와 영역을 잘 제시하고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해 낼 것인지를 서로 진지하게 자주 협의해 공감을 얻어내야 합니다.”


구성원의 존재 의미와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관계설정을 잘 해줘야 기업의 리더십이 크게 발휘된다고 전 소장은 말했다.

 

“조직 내에서 불화와 갈등이 일어날 경우, 인문학이 인간의 이해와 화합을 강조해온 점을 참고 불화를 잘 봉합해야 합니다. 한약처방으로 체질을 보강하듯 조직이 정신적·정서적으로 계속 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늘 조정해야 합니다.”

 

 

짧은 역사를 지닌 기업일수록  
인문학적 지식과 경험 적극 도입해야


 인문학은 수천 년 동안 경제, 사회, 문화 등은 물론, 특히 인간을 아울러 왔음은 검증된 바 있다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짧은 역사를 지닌 기업일수록 유구한 인간사회에서 축적된 인문학적인 지식과 경험을 기업에 도입해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성장의 주요 거름이 된다고 강조했다.


“인문학을 강조하는 기업일수록 내부 단합이 잘되고 고객과 시장에 대한 이해가 높습니다. 글로벌기업인 애플과 구글은 인문경영을 기술개발보다 더 중요시합니다.”

 

한편, 동양 인문학의 원천 가치철학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은 사람이 지켜야 할 귀중한 생활덕목인데, 기업들이 이를 제품 생산과 고객서비스에 반영할 경우 품질이 개선되고 이익이 자동으로 창출된다고 전 소장은 말한다.

 

 

세종대왕은 백성의 근면성, 높은 IQ로
성장해법 찾아 조선의 르네상스 이뤄내


 전경일 소장은 찬란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뤄낸 세종대왕의 국가경영전략을 기업경영에 적용할 경우, 기업 미래발전의 강력한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대왕 즉위(1397년) 당시 조선의 상황을 녹록치 않았습니다. 성장동력을 찾는 일이 매우 중요했죠.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오직 백성의 근면성과 똑똑한 두뇌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IQ 106으로 세계 1위이고, 한국인은 105로 2위였죠. 세종대왕은 이러한 백성의 근면성과 높은 IQ를 바탕으로 성장 해법을 찾았던 것이죠.”

 

세종대왕은 즉위 10년차에 농업 증산을 이끌 생각으로 전라, 충청, 경상 감사에게 나이가 많고 농사를 잘 짓는 독농가를 찾아 풍작농사의 숨은 비결을 찾아내라고 했고, 이를 취합해 ‘농사직설’을 펴냈다.


이 책이 나오면서 쌀은 300~600% 더 생산됐고, 소아 사망률은 33%나 줄었다. 세금은 100% 더 걷어 일반 백성들의 세부담은 10~20% 줄어들었다. 남는 예산으로 문화, 경제 부문에 투자해 조선의 찬란한 르네상스를 이뤄낸 것이다. 세종대왕은 중국식농법에서 한국 고유의 농법을 개발·보급하는 전기를 만들었다.

 

이 사례만 보면 기업이 자금이 없더라도 시장을 잘 관찰하고 임직원의 지식과 아이디어만 갖고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전 소장은 말한다.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DMZ지대인 펀치볼 마을의 이창순 씨는 토종무 중 뿌리는 작아도 잎이 무성한 무를 갖고 농촌진흥청을 찾았다. 이 무 잎을 시래기로 만들어 비닐포장한 후 인터넷과 백화점 판매계획을 상담했다. 농촌진흥청의 지도와 지원을 받고 시래기를 완판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이창순 씨 세종식 창조발상으로 시래기의 상품화로 대박을 낸 것이다.


전경일 소장은 이창순 씨와 같이 면밀히 관찰하고 발상을 전환하면 농촌에서도 새 소득원을 개발할 것이 숱하게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
일본으로 건너가 우리보다 더 성장


 이어 전 소장은 문익점의 목화씨 도입과 일본 전파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놨다.


일본은 임진왜란 전 부유한 관료층만 비단옷을 입었다. 신분이 천한 사람들은 겨울에도 삼베옷을 입을 수밖에 없어 많은 서민이 얼어 죽었다. 목화씨가 일본으로 건너가 면직기가 개발되면서 80%의 서민들이 면옷을 입을 수 있었고, 동사도 대폭 줄었다.


‘목화는 하늘이 내린 식물’로 여겨지며 일본인으로부터 대대적인 각광을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병사들의 군복과 이불인 군포(軍布)와 화승포의 심지, 선박의 돛으로 사용돼 조선 침략의 도구가 된다.

 

도요타자동차 창업주인 도요타 사키치는 도쿄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출품된 영국의 자동직기를 보고 이 직기를 사들여 1935년 도요타방직회사를 창업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그 아들인 도요타 키이치로가 1937년 도요타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고, G1형 트럭을 완성해 본격적으로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이 트럭은 일제식민시절 강제로 징용된 용병과 위안부를 태우고 한반도와 만주를 오가며 만주 침략의 도구로 쓰였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도요타자동차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망할 처지에 빠졌다. 그러나 얼마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으로부터 트럭을 대량 주문받아 기사회생했다. 결국 도요타자동차는 목화씨로 엄청난 성장을 이뤄낸 것이다.

 

목화씨를 홀대한 우리는 목화의 산업화 혁신을 못하고 일본 성장의 열쇠를 내준다. 목화씨에 얽힌 역사적 과오 깊

은 반성 성찰을 해야 한다.


전경일 소장은 이 같은 사례를 들며 “인문역사서를 잘 살피면 기업의 성장을 살필 수 있는 단서가 보입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특강안내] 세종과 장영실의 혁신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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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강안내] 세종과 장영실의 혁신 리더십

 

세종 121023일 기록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임금이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수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걸 알 수 있다. 세종은 왜 수학을 배웠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과학 발명품 때문이었다. 세종이 추구하는 신생 조선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과학과 기술이었다. 그런데 왜 그 시기 과학 기술이 특별히 강조된 것일까? 그 이유를 따져 들어가 보면 결국엔 국가를 운용하는 철학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유교적 이념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은 그 이상에 충실했는데, 유교적 철학 원리에 의하면, 국왕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것(‘대천이물(代天而物)’ 사상)’존재이다. 그것이 군주가 된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늘이란 건 바로 백성을 뜻한다. ‘하늘()이 곧 백성()’이고 백성이 곧 하늘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하늘같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위해서도 천문을 연구하는 수학과 과학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세종 시대 천문학, 수학이 발달하고, 과학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천명을 받아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이런 유교적 철학 원리가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발명품들은 정확히 계산되고 맞아 떨어지는지 알기 위해서도 또 반드시 수학이 필요했다. 실록에 나타나는 것처럼 국왕이 계몽산을 배우고자 한 건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종이 배웠다는 계몽산이란 어떤 책일까? 이 책은 중국의 대표적인 수학 고전인산학계몽(算學啓蒙)을 가리킨다. 이 책은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수학 고전으로써 수학의 모든 것을 망라한 교과서 같은 것이었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수학물리학천문학적 지식이 다 합쳐진 산학의 정석인 셈이다. 이 책은 쉬운 문제부터 고급 수학까지 다루고 있고 특히 중국에서 발달한 방정식 - ‘천원술(天元術)’이라 불림 - 도 들어 있다. 세종은 수학을 단순히 학문으로만 배우고 다루지 않았다. 통치의 술()로까지 받아들였다.

 

자신의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는 데에는 발명가 집단을 대거 발탁하고, 육성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세종이 주도하는 역사 무대에 장영실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영실을 비롯해 이들 발명가들은 과학기기를 만드는데 수학적 원리를 활용했고, 발명품의 정밀도를 따져 보는 데에도 수학을 반드시 활용했다. 따라서 이들 집단들과 소통하기 위해 세종이 수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수학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세종은 13(1431)에 명나라에 학자들을 보내 수학을 연구하게 할 정도였다.

 

장영실이 발명에 간여한 각종 과학 기구들을 보자.

 

물시계인 자격루, 옥루(玉漏), 천체관측용 기구인 대 ·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天平)일구, 고정된 정남(定南)일구, 앙부(仰釜)일구,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등 과학 발명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학을 알아야만 한다. 작동 원리는 물론 이 같은 과학 기구의 천문 지리적 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기 위해서도 수학은 쓰였다.

 

특히 혼천의는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정인지, 정초 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 장영실 등이 제작 감독을 맡았는데, 한양 북극 출지 38도를 정하고, 그에 따라 여러 관측 의상들을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가 찾아지는데, 수학적 원리 하에 서울을 지리 및 천문의 기준으로 삼는 우리 관측기구를 만들게 되면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커진 점이다. 15세기 조선을 위대한 과학 문명국으로 만든 힘은 수학이 가져온 또 다른 자각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종은 스스로 수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그런 까닭에 재임 중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라는 지시를 여러 번 내리기도 했다. 세종 시대 과학 기구들은 국왕인 세종과 장영실을 비롯한 수많은 장인들의 공통된 언어, 즉 수학에 크게 바탕을 둔 것이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쓴연려실기술을 보면, 세종과 장영실의 뜻 깊은 만남이 잘 그려져 있다. 세종 3(1421)이니까, 세종이 국왕이 된지 3년 되 해, 즉 세종의 나이 25세 때 일이었다. 이 해 3월 세종은 주자(鑄字)를 만들어 인쇄술을 대폭 개량하는 성과를 이미 얻어낸 상태였다. 이 젊고 패기에 찬 영명한 임금은 뭔가 획기적인 일을 도모하고 싶었다. 그 뜻이 이날의 만남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세종 3,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내감(內監)으로 불러서 선기옥형(璇璣玉衡)(혼천의를 말한다.) 제도를 논란 강구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장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들을 중국에 보낼 때에는 예부에 공문을 보내서 역산학과 각종 천문 서책들을 무역하고 보루각, 흠경각의 혼천의(渾天儀) 도식(圖式)을 견양(見樣)하여 가져오게 하라.’하고 은냥(銀兩)과 물산(物産)을 많이 주었다.”

 

세종과의 역사적 만남을 이룬 장영실! 그것은 신분을 뛰어넘어 천재들끼리의 만남이었다.

장영실은 원래 부산 동래현의 관노였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원나라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기녀였다. 이런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장영실을 대소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6품인 상의원의 별좌에 임명하게 된다. 이 직책은 왕실천문지리역법 연구기관인 서운관의 천문학 교수 및 고을의 현감과도 같은 지위였다.

 

일개 관노가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할지라도 이렇게 특별 발탁이 된 예는 극히 드문 경우였다 이런 발탁인사조치가 자칫 신분제도에 커다란 혼란을 줄까봐 신료들은 크게 반대하였다. 기득권층은 신분사회의 틈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재에 대한 갈망은 세종으로 하여금 장영실을 발탁하게 했다.

 

발탁과 함께 장영실은 윤사웅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중국과 이슬람의 최첨단의 관측기기들을 보고 관련 책들을 구해 오게 하는 임무를 맡는다.(세종3, 1421) 자격루를 제작하기 위한 것이었. 이들은 이듬해(1422)에 돌아와 세종의 명으로 천문관측소를 만들게 되는데, 시험 단계에 성공하자 세종14(1432)년에 본격적으로 대규모 천문관측소 설립에 착수하게 된다. 10년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들이 중국에 갔다온 지 12, 천문관측소 설립에 착수한지 2년 후인 세종16(1434) 6월 마침내 자격루는 완성되어 경복궁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에 설치되게 된다.

 

<자격루>는 장영실이 노비 신분을 벗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발명품으로 세종의 염원이자, 기계 제작 기술자들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이 자동 물시계는 15세기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물시계였다.

 

그렇다면 세종 시대에 장영실과 같은 수많은 인재들이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종시대 과학이 유례없이 발전한 것은 세종의 능력주의에 근거한 발탁인사가 크게 한 몫 했다. 세종이 장영실과 같은 과학 기술 분야의 숨은 보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활발한 제안과 천거제도 덕분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세종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투자를 해 장영실을 과학 기기 분야의 글로벌 인재로 키워냈다.

 

연려실기술에는 장영실이 이룬 성과와 발탁 승진의 배경이 잘 나타나 있다.

세종 710월에 양각(兩閣)을 준공하여 임금이 친히 내감에 가서 두루 보고 이르기를, ‘기특하다. 훌륭한 장영실이 귀중한 보배를 성취하였으니 그 공이 둘도 없다.’하고 천민의 신분을 벗겨 주고 승진시켜 실첨지(實僉知)를 제수하고 겸하여 물시계의 일을 살피게 하여 서울을 떠나지 않게 했고, 감조관(監造官) 윤사웅 등 세 사람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하셨다.”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은 우리 과학 기술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장영실의 이런 극적인 인생은 세종 24(1442) 그가 제작을 감독한 임금의 가마가 부러지며 불경죄로 직첩(職牒)이 회수되고 곤장 80대를 맞는 처벌을 받으면서 더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 베일엔 오늘날까지도 무수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곡선은 왜 휘지 않고 똑 바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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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은 왜 휘지 않고 똑 바른가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수학자들의 관심사는 ‘17세기적 발견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을 사로잡은 이는 두 명의 혁신적인 수학자였다. 인류 역사상 누구보다도 위대한 수학자로 만유인력과 세 가지 핵심적인 운동 법칙을 통찰해 낸 아이작 뉴턴이 대표적 인물이다. 빛이 지나는 경로는 두 지점을 잇는 경로 중 지나는 시간을 가장 짧게 하는 경로를 택한다라는 페르마 원리로 유명한 피에르 드 페르마가 나머지 한 사람이다. 이 두 수학자의 위대한 발견에 힘입어 18세기 수학자들은 변화와 우연의 실용 영역을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런 맥락에서 페르마가 주사위의 점이 몇 개 나타날지 예측하는 확률론을 착안해 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수학은 더는 새로울 것도, 도전할 것도 없을 것만 같아 보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친구인 장 밥티스트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학은 너무 깊어졌으며 이미 파낼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푸념할 정도였다. 뉴턴 이래 고전역학을 가장 포괄적으로 다뤘고, 19세기 수리물리학의 기반을 마련한 수학자로 평가되는 사람마저 이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당시 수학계의 전반적인 인식이 어땠을지 짐작 간다. 이때가 1781년 무렵이었다. 그에 대해 친구는 동병상련의 심정에 젖어서는 딱히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전진, 전진! 진리는 그러는 동안에 찾아오리라!”라는 위로의 답장을 써서 보냈다. 이렇듯 18세기 수학은 갈 데까지 다 간 것처럼 보였다.

 

더는 도달할 목표가 없을 것 같던 수학은 19세기에 들어서자, 이전의 견고하던 발판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직관과 상식에 의존하던 수학에서 절대적 정확성을 추구하는 논리 위의 수학으로 넘어간 것이다. 새로운 수의 영역이 생겨나자 그때까지 계산에 쓰이던 낡은 수는 이제 단순한 일부에 불과했다. 그에 따라 그동안 추상을 다루던 수학은 퇴조했다. 삼각법, 대수(對數), 함수 등도 포함되고, 어제까지만 해도 ab= ba라는 등식은 ‘ab가 반드시 ba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묘한 신법칙이 등장하며 완전히 차원을 달리했다. 또 종래에 대수를 구성하던 모든 기호도 대체되었다.

 

이런 암중모색 상태에서 19세기 수학을 지배하게 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독일의 위대한 천재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다.(자장(磁場)강도를 측정하는 단위인 가우스, 배가 자기(磁器)를 배제해 기뢰를 피하는 측정기를 해군용어로 데가우싱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전기에 대한 가우스의 연구를 기리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가우스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불과 3살 때인 1779, 직인 우두머리였던 아버지가 벽돌공의 봉급 전표를 계산하는 것을 보고 계산 착오를 지적할 정도였다. 아버지가 다시 계산해보니 놀랍게도 어린 아들의 계산이 옳았다. 일설에 의하면, 가우스는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이부터 산술의 기본법칙에 관해 골똘히 궁리하곤 했다. 10세 때에는 학교에서 1에서 100까지 더하면 얼마가 되느냐는 질문을 받고 석판에 당장 5050이라 쓰고 이것이 답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다른 학생들이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숫자를 휘갈겨 쓴 석판을 제출했지만 아무도 정답을 내지 못한 것과 달리 가우스는 1100, 299, 398, 497······, 5051하는 식으로 쌍을 이룬 수()의 짝을 만들고 각각의 합이 101이므로 합계하면 10150이 되는 것을 순간적으로 생각해냈을 것이다. 장차 수학계의 모차르트로 불리게 될 이 신동은 14세 때 브라운시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공의 주목을 받아 대학을 끝내고 청년기에 이를 때까지 그의 도움을 받게 된다. 가우스는 이 행운을 충분히 활용해 공부에 열중했다. 공부 대상도 고전문학에서 대수표까지 광범위 했고, 기하, 대수, 미적분과 함께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덴마크어까지 독파했다.

 

숱한 창조적 생각과 발견을 이뤄냈지만 그는 뭐든 반쯤 전개시킨 뒤 내동댕이치고 그것을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성숙하는 것은 적다라는 그 자신의 지론 때문이었다. 또한 자기 착상이 다른 수학자들로부터 지나치게 정통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받을까 봐 두려워 해 몇 개는 혼자만 간직한 채 발표하지도 않았다.

 

유클리드 이후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던 공간은 직선으로 잘라서 도시해야 한다라는 말에 그는 절대로 처음부터 그러해야 할 아무런 이유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공간은 실제로는 왜 만곡(彎曲, 굽은)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공간은 휘어져 있어도 좋을 법하지 않은가. 진리에 접근했지만, 그는 이 생각을 가슴 속에 깊이 감춰 두었다.

 

이 시기 가우스를 줄곧 매료시킨 기하학적 아이디어는 만곡된 공간 개념이었다. , 주어진 직선 위에 없는 한 점을 지나 그 직선에 1개 이상의 평행선을 그을 수 있다는 묘한 공리에 의해 새 종류의 2차원적 기하학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이 새 공리는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어진 직선 바깥의 한 점으로부터는 평행선을 오직 1개밖에 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 유명한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제다. 가우스의 공리는 이 명제에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만년에 들어서야 가우스는 평행선의 비()유클리드적 법칙에 관한 자기 아이디어가 만곡된 공간의 단면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우스를 있게 한 것은 수학의 제분야에 걸친 연구 주제를 굳이 하나의 장()에서 추구하고자 한 이유도 있지만, 생애를 통해 그의 주변에 어떤 시대보다도 많은 새로운 수학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속한 시대적 산물이자, 그가 열어젖힌 새로운 세계였다.

 

가우스가 도달한 영역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다음 세대의 젊은 수학자는 베른하르트 리만이었다. 리만은 다차원의 아이디어를 본 궤도에 올리기 위해 곡선과 곡면의 특성을 일반화하여 모든 차원의 공간에 적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가우스 연구를 기초로 하여 가정곡선공간(假定曲線空間)과 삼차원 이상의 공간을 취급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발전시켰다. 리만은 3차원의 굽은 공간을 비롯해 최후에는 4차원과 그 이상의 다차원으로 이루어지는 환상적인 공간까지 가정했다.

  

 

() 유클리드의 상식적 공간. 유클리드는 만곡 되지 않은 평면을 주장했다. 여기서 직선은 최단경로를 취하며,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를 이룬다. 또한 삼각형은 일그러뜨리지 않은 채 이동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가우스는 이러한 평면도 곡면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기하학의 하나의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했다. (가운데) 리만의 독창적 공간. 리만이 생각한 것은 이른바 굽은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는 두 지점 간 최단 경로는 곡선이 되며 삼각형은 이동함에 따라 일그러진다. 언제나 180도이어야 할 내각의 총합도 삼각형이 움직임에 따라 변한다.

 

(아래) 아인슈타인의 우주공간. 별 같은 천체가 리만이 고안한 굽은 공간의 한 단면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별의 질량이 곡률을 낳는다. 그것은 공간 왜곡에 의한 것으로 물질이 서로 당기는 인력 때문은 아니다.

 

 

 

 

 

 

              ()                                    ()

()옴폭옴폭한 점토로 만든 태양계 모형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른 것이다. 태양과 그것을 둘러싼 행성은 각기 공간 속에서 옴폭한 포킷을 가지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만곡 때문에 천체 옆을 지나는 광선은 휘어지리라고 예언했고 과학자들은 그것을 입증해 냈다. 마치 골프공이 기복이 심한 골프장 위를 굴러가듯 우주선의 진로도 우주의 굴곡 때문에 비틀거리게 된다.

 

() 빛은 중력장을 통과할 때 구부러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1919년 개기일식 때 증명되었다. 상단의 그림은 별 A와 별 B의 빛이 정상적으로 지구에 도달하는 통로를 나타낸 것이다. 일식 때는 태양이 이 두 개의 통로 사이로 지나갔다. 그리고 어두워졌을 때 2개의 별을 사진으로 찍어보니 아인슈타인의 예언대로 아래 그림과 같이 광선은 중력으로 구부러졌다. 그 때문에 광선은 점선상의 AB에서 오는 것같이 보였다. 다시 말하면 태양이 지나감에 따라 마치 별 자체가 움직이는 것같이 느껴졌다.

 

다시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런 추상의 힘을 빌러 상대성이론에서 우주의 실태를 기술하고 가우스와 리만의 방법을 최고의 경지까지 발전시켰다. 이 위대한 물리학자의 상대성이론은 쉽게 설명하면 이해하기 전혀 어렵지 않다. 상대성이론은 특수 상대성이론과 일반 상대성이론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는 1905년에, 후자는 1916년에 각각 발표된 것으로 양자 모두 모든 과학적 측정은 관측자[좌표계(座標系)]에 따라 달라진다는 전제 하에 출발한다. 다시 말해 어떤 현상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기술하거나 거리를 측정하는 데 있어 기준이 될 만한 고정된 중심이 이 우주에는 없다는 것이다.

 

특수 상대성이론은 아득히 먼 은하나 원자 미립자처럼 초속 30만 킬로미터라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와 에너지에 관해 뉴턴 역학의 방정식으로써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는 걸 밝히고 시정한 것이다. 원자식 E=mc<!--[if !vml]--><!--[endif]--> (에너지 E는 질량 m에 빛의 속도 c의 제곱을 곱한 것과 같다.)은 특수 상대성이론의 필연적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일반 상대성이론은 특수 상대성이론과 동일한 테마를 더욱 엄밀하게 추구한다. 특수 상대성이론에서는 뉴턴의 법칙을 수정하여 직선을 따라 일정한 속도로 빨리 움직이는 물체에 적용했지만, 일반 상대성이론에서는 독자적인 방정식을 전개하여 곡선을 따라 속도를 바꾸면서 움직이는 물체에도 적용되도록 했다.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의 방정식이라 불리는 것은 운동의 모든 가능한 상태를 총망라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한의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움직임까지도 나타내고 있다. 약간의 기호만으로 적혀 있는 이 방정식은 철학 서적만큼이나 난해하고 또 경이적이며 실로 엄청나게 광범위한 적용 범위를 갖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방정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리만의 아이디어를 빌린 덕분이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살고, 별이 운행하는 공간은 실제로는 굽어 있다. 공간에 곡률이 생기는 것은 시공연속체(時空連續體) 속에 중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물질과 에너지의 움직임에 따라 주변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가우스에서 리만 그리고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지는 직선에서 만곡으로의 이행은 그간 상식적 공간으로 알아왔던 유클리드의 평면이 만곡된 상태라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만곡된 공간에서의 삼각형은 움직임에 따라 변하며, 평면에서처럼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닐 수 있다. 이런 것은 이전에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라고 배워 온 개념을 확 바꿔 버린다. 마치 대수에서 ‘ab가 반드시 ba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과학 분야에서만 해석 가능할까? 공간의 왜곡에 의해 질량이 곡률을 낳는다는 정리는 얼마든지 다른 분야에도 적용 가능하다. 즉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은 더 큰 세상에 의해 영향 받으며,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조차 수직이 아닌 곡률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 세상을 움직이는 주요 원리로 서로를 잡아끄는 힘인 인력(引力)을 중시하던 것에서 이제는 각자 왜곡된 세상에서 왜곡된 상태로 위치 지워지는 인간 존재를 엿보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관념적으로 이해하듯 왜곡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굽은 공간에서 굽은 상태는 다른 관측자 관점에서 보면 한없이 만곡된 곡선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툰 석수장이처럼 수학이나 물리학을 인간사의 모든 면에 맞추려하진 않아도 여러 면에서 세상사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 점에서 우리는 우주적 원리를 꿰뚫려 하기보다 17세기 수학자들처럼 그저 변화와 우연의 영역을 탐구하는 사람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마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인을 향할 때 자신이 휘어진 줄도 모르고 직선을 그으며 가고 있다고 믿거나, 혹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는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그런 우매함처럼 말이다. 이런 석수장이는 인간사에서도 그렇지만, 이 광활한 우주에서는 별 쓸모없어 보인다. 누구건 휘고 굽어 있다. 요는 무엇을 향해 그러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What is worth while?)1-애나 로버트슨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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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단 한번 뿐입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누구든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번 뿐인 인생을 잘 살다가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일까요? 우리가 지닌 힘과 활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어떤 계기를 만날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희망에 부풀어 사회에 첫 걸음을 내딛을 때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때에도, 좌절과 성취를 맛볼 때에도, 아파서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삶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지만, 뜻하지 않게 헛된 결과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땐 불안과 실망, 불만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을 사는 일은 생각과는 사뭇 다르지요. 잔잔한 호수 같은 삶을 살다가도 변화를 겪는 일이 몰려오곤 합니다. 특히나 세상살이는 정해진 일만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모든 게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경험할 테고, 슬기롭게 생활하지 않는 이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곤 합니다. 이런 삶에서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나는 가치 있는 삶의 진실을 당신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인생은 광범위합니다. 고작 몇 십 년 사는 동안 인생을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단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인생이 여러 번이라면 우리는 좀 더 잘 사는 방법을 익힐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번 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그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겪는 상황도 벌어집니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인생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과도한 욕망의 집착을 버릴 때 우리 삶은 살찌고, 이롭게 될까요?

 

우리는 오늘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놓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훌훌 던져 버려야 하는지, 그런 질문을 말입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What is worth while?)-애나 로버트슨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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