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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영자는 혁신 등반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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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영자는 혁신 등반을 꿈꾼다

모든 방법을 구사해 산을 오르라. 그래야 달라질 수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히말라야 원정대는 대규모로 이뤄지는 게 상식처럼 여겨졌다. 따라서 수많은 물자와 이를 나르는 포터들이 동원돼야 했고 예산도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다 원정대가 산에 버리고 가는 쓰레기도 큰 골칫거리로 남았다.


이러한 상식에 반기를 든 등반가가 바로 라인홀트 메스너이다. 그는 낭가파르바트 앞에서 불현듯 전혀 다른 혁신, 즉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단독등반’을 떠올렸다. 당시로서는 무모해보였던 그의 생각은 혁신 등반의 새로운 장을 여는 동시에, 치열한 경영환경에 선 경영자들에게 가볍고 경쾌하며 속도감 있는 경영 전략을 구사하도록 영감을 주고 있다. 이것은 마치 칭기즈칸의 몽골 전사가 소 오줌통 하나에 한 달 치 식량인 말린 양고기를 담아, 갑옷도 없이 초원을 내달리며 대륙을 정복하던 혁신적인 전투기법과 유사하다. 이들은 튼튼하고 몸집이 작은 몽골말을 타고 유럽의 골목골목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유린해 ‘몽고군은 개를 타고 왔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면 메스너의 혁신적인 사고를 현실로 만든 단독등반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당시 원정대는 규모도 컸고 물자도 수 톤에 이르렀다. 동생 권터와 나는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낭가파르바트 벽에서 40일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히말라야 등반에 관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이제까지 원정대에 관한 책을 통해 알았던 8,000미터급 거봉을 나는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산 등반가들로부터배운 온갖 방식을 버리기로했다. 나는 산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전통적인 공격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나는 히말라야를 재발견하고 나 자신의 꿈을 키우며 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8,000미터급 거봉은 대규모 원정대를 꾸리지 않고는 결코 오르지 못한다는 편견이 지난날의 단독등반을 좌절시켰다. 단독등반은 마술 같은 일이라고 여겨졌고 심지어 그 아이디어는 이단시되었다. 어느 시대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역사적으로 오늘 미친 짓이라고 웃음거리가 되던 일이 내일 옳은 일로 인정받게 된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제7급 문제나 무산소 에베레스트 등정 문제가 그랬고 이번 단독등반도 마찬가지일것이다.(라인홀트 메스너, ≪검은 고독 흰 고독≫)


경영을 하다보면 벽에 부딪혀 진로를 확보하지 못한 채 관망하게 되는 때가 있다. 이 경우 많은 경영자들은 좌절하거나 불평을 쏟아내지만 지혜로운 경영자는 전략을 짠다. 메스너는 40일간의 숙고 끝에 단독등반이라는 착상을 얻었다. 아마도 그는 그때 짜릿한 느낌으로 전율했을 것이다. 그런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거의 생각, 믿음, 조롱 심지어 가르침까지 집어던지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사업의 다른 면, 즉 생존과 활력의 각도가 나온다.


이처럼 혁신은 달라짐으로써 재발견하는 것이다. 달리 생각하지 않으면 끝내 찾아낼 수 없다. 혁신의 또 다른 대표적인 예로는 마이크로칩이 있다.


1958년 7월 24일, 잭 세인트 클레어 킬비(Jack St. Clair Kilby)는 강력한 컴퓨터처럼 새로운 전자장비에 쓰일 배선을 설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배선이 들어가야 하고, 수백만 개의 납땜 커넥터가 필요한 이 작업을 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기술자가 앞 다퉈 해법을 찾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런 장치를 만들 수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고심하던 그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저항기, 콘덴서, 배분 콘덴서, 트랜지스터를 모두 하나의 칩에 담아내는 거다!’


이것은 기존의 방식과 달리 배선을 완전히 제거하는 새로운 방식이었고 그 순간 전자회로의 오랜 역사와의 결별이 시작되었다. 그 대단한 착상을 두고 처음에는 누구도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회로의 모든 기본요소를 똑같은 물질, 즉 실리콘으로 만들 수 있음을 알아냈다. 그러면 엄청난 부품을 작은 공간에 압축해 넣는 대신 배선은 필요 없게 된다.


손톱만 한 칩에 모든 컴퓨터 회로를 집어넣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마침내 마이크로칩 시대를 열었고, 오늘날 PC, 휴대전화, 인터넷 등의 IT혁명을 가져왔다.


어떤 분야에서든 혁신적 사고가 없었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일이 아주 많다. 특히 경영일선에서 혁신에 주목하고 이를 잘 관리한다면 기업 성장의 핵심 동력이 될 수 있다.


산행 중에 무슨 생각을 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산을 오르고 있는가? 경영자는 늘 이 문제를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즐기기 위해 산을 오른다면 산에서 배워야 할 것의 1할도 배우지 못하고 내려오게 될 것이다. 산 그리고 자신이 달리 보이고, 미래에 달라질 내 사업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혁신 등반이 아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의 생각이 산 아래의 판도를 바꾼다. 그래서 산꾼 경영자는 가끔 다른 길로 오르기도 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초발확산가들의 무한 지식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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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확산가들의 무한 지식경영


주지했다시피 고구마의 최초 전래자는 조엄이다. 하지만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인물은 강필리와 이광려, 김장순 같은 이들이다. 특히 강필리는 1764년 8월 동래부사로 부임해 온 뒤 조엄이 6월에 2차로 전달한 종자를 받아 보관하는 한편, 조엄의 요청에 따라 일부를 제주도로 보냈다. 이때 종자와 함께 조엄이 보낸 재배법 자료는 구황 작물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강필리가 편찬한 ⟪강씨감저보⟫는 1764년 조엄이 대마도와 일본에서 수집한 자료를 보완해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부산진 첨사 이응혁이 절영도에서 시험 재배한 경험도 반영되었을 여지가 있다. 강필리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조선에서 처음으로 재배하는 고구마 종자는 각 지방으로 전해지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재배법과 함께 보급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강씨감저보⟫는 서책이 아니라 필사본으로 전해왔다. 이 원천 자료를 근간으로 고구마 지식은 이후 급속도로 확장되는데, 50여년이 지난 1813년에는 김장순(金長淳)과 전남 보성의 주민 선종한(宣宗漢)이 9년간 고구마를 재배하며 연구한 끝에 ⟪감저신보(甘藷新譜)⟫를 펴냈다. 1805년에는 이광려가 ⟪이참봉집(李參奉集)⟫을, 1813년에는 서경창이 ⟪종저방(種藷方)⟫을, 1834년에는 서유구가 ⟪종저보(種藷譜)⟫를, 조엄의 손자 조인영이 ⟪운석유고(雲石遺稿)⟫를 내놨다. 조선 각지에서는 고구마 육종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고, 좋은 상품을 더욱 좋게 만들려는 노력들이 붐을 이루며 릴레이 현상처럼 퍼져나갔다. 이는 두말할 필요 없이 자발적 참여와 지식증강이 자연스럽게 누적된 효과였다.


이광려와 강계현 팀

1763년 10월 중순 고구마 종자가 부산포에 도착한 직후 이 새로운 작물은 금방 입소문을 탔다. 고구마 종자를 가져온 지 불과 7개월 만에 정보는 금방 퍼져나갔다. 신생 작물이 지닌 강력한 소구력, 상품성, 구황식물 대체 가능성이 불러 온 열풍이었다. 원천 종자를 구하기 위해 초기 확산자들은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였고, 모여 들었다.


이광려가 지은 ⟪이참봉집⟫에는 이광려와 강계현이 고구마 종자를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뛴 내용이 나온다. 일본을 통해 조선에 고구마가 도입・보급되는 과정은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한 갈래는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구매해 동래로 보낸 과정과, 다른 하나는 조엄이 구해온 고구마 종자를 이광려가 취득해 전파시키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고구마 종자를 국내에 전파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광려는 누구였을까?


그는 조선 후기 양명학의 수용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천거를 받아 참봉 벼슬을 했다. 연암 박지원(朴趾源)과도 교의가 두터웠다. 그의 아버지 이진수는 양명학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1725년 이진수가 평안도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그 밑에서 학문을 배운 계덕해라는 인물은 이진수가 지행합일의 양명학 기본 논지를 적극 실천했음을 전하고 있다. 이광려가 고구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실리에 바탕을 둔 학문에 관심이 두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그는 중국 서광계의 ⟪농정대전⟫을 보고 고구마에 관한 사전 지식을 얻고 있었다.


1762년 인척인 서지수(徐之修)가 호조판서로 연경으로 가는 사신단에 참여하게 되자 이광려는 편지를 보내 종자를 구해줄 것을 수차례 부탁한다. 이는 조엄이 일본에 통신정사로 가게 된 것보다 1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때 이미 이광려는 고구마를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광려가 고구마를 도입하고자 한 것은 “백성들의 기아를 면하게 하고, 도적을 그치게 하며, 백폐(百弊)를 모두 해소할 수 있는 방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식량 문제 해결을 통해 사회적・제도적 문제까지 해결하려한, 성장 엔진을 가동시켜 조선이 처한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라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서지수는 연경을 다녀오면서 종자를 구해서 돌아오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가져오는 도중에 모두 고사해 버리고 만다.


이후 이광려는 1763년 친구의 아들이 조엄의 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가게 되자 고구마 종자를 구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1년 전의 실패에 실망하지 않고 왜관(倭館)이 있는 부산포나 동래에 가면 종자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궁리한다. 그러던 1764년 봄, 그는 집의 식객인 강계현에게 통신사 일행이 고구마 종자를 구할지 확신할 수가 없고 혹여 고구마가 동래와 부산지역에 전파된 게 있지 않을까 하는데 다녀올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러자 강계현은 선뜻 다녀오겠다고 나선다. 고구마 종자를 구하기 위해 강계현이 길을 나선 것은 1764년 4월이었다. 강계현은 이광려의 친구가 부사로 근무하는 밀양으로 소개장을 가지고 갔으나 구하지 못하고 다시 동래로 갔다. 동래에서도 종자는 구할 수 없었다. 동래와 부산지역에 고구마가 전래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통신사 일행이 귀국하여 밀양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강계현은 당시 밀양현 하급관원인 김인대를 만나 조엄 사행단 일행에게서 종자 하나를 얻어 나무 궤에 담아 돌아온다. 이때 강계현이 얻은 고구마 종자는 통신사가 대마도에서 구해 온 것이었다. 조엄이 수행원 중 밀양으로 가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종자를 확산시키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광려는 어렵사리 구한 고구마 종자를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 앞 공터에 심었는데 8~9월이 되어 잎이 매우 무성하게 나면서 거의 몇 보의 땅을 뒤덮게 되었다. 이광려는 이웃사람의 친척으로 새로 동래부사에 임명된 강필리에게 고구마의 일을 편지로 써서 보냈다. 그런데 이광려가 재배한 이 고구마는 제대로 보관을 하지 못한 탓에 다음해에 종자로 쓸 수 없게 된다. 증식에 실패한 것이다.


한편 동래부사 강필리는 이광려의 편지를 받고 다음해인 1765년 고구마 종자 증식에 성공해 서울에 있는 자신의 본가에 고구마 종자를 다량으로 실어 보낸다. 이 종자는 조엄이 2차로 가지고 온 종자를 동래부에서 증식한 1세대 조선 고구마였다. 이에 이광려는 강필리의 집에서 고구마 종자 몇 개를 이듬해 다시 얻어 심었다. 이광려와 강필리가 각각 서울과 동래에서 고구마 증식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때가 바로 고구마가 온 나라에 전파되기 시작한 1766년이다. 실학자 서유구도 본격적으로 조선에 고구마 종자가 보급된 해를 이 때로 보고 있다. 이 해를 보급기로 보는 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사고하는데서 연유한다. 이때 이광려가 강계현을 통하거나 직접 종자를 구하기 위해 뛰었던 것은 개인적 관심이 반영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서울에서도 이미 고구마가 진미라는 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의 보급은 1765년이지만, 조엄이 1763년(1차)과 1764(2차)년에 가져온 고구마 종자는 이때 이미 영남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강필리는 경험을 바탕으로 재배법의 일단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혁신가의 혁신 계승이 단절의 위기를 맞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강필리의 동생인 강필교가 쓴 ⟪감저보⟫의 서문에 잘 나와 있다.


아, 공(강필리)이 세상을 떠남에 고구마 종자 역시 끊어졌다. 백성들에게 두루 혜택을 주려고 했던 공의 생각이 끝내 성취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에 가장(家藏)되어 있던 ⟪저보(藷譜)⟫까지 분실하였고, 경성(京城) 여러 곳에 심었던 감저 또한 모두 단절되고 말았다. 소문에 영호남 사이에 더러 고구마가 있다고 하지만 멀어서 구해보지 못하였다.


이 점은 혁신이 지속적인 노력을 전제로 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즉, 혁신관리 역량이 혁신을 계승하고 발전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이광려의 역할이다. 그는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던 당시,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고 일찍부터 책을 통해 고구마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조엄이 가지고 들어온 고구마로 재배에 착수했지만 기술이 부족해 실패하게 되는데, 이 같은 시도는 오히려 동래부사 강필리를 자극해 고구마 재배에 성공을 거두게 한 밑바탕이 된다. 프로젝트는 실패했어도, 다른 사람의 성공을 고무시킨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그리하여 조엄, 이광려, 강필리, 강필교 등 일부 관인, 사족 층의 노력에 힘입어 고구마는 18세기 후반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재배 지역이 확대된다. 애초에 고구마가 도입된 지역이었던 동래, 부산 등 영남 남해안 지역으로부터 퍼져나가며 점차 북상하였다. 이는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목화씨가 진양(산청)을 거점으로 삼남지역 일대로 확산되어 가다가 북상했던 것과 같은 양태를 보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때 고구마 재배 확대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 실제 고구마를 경작한 농민들이라는 점이다. 이 점 역시 목화씨가 진양 주변 마을사람들의 손을 빌어 삼남지방으로 퍼지다가 전국 각처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과 같다. 그리하여 목화는 채종에 성공한 지 채 10년도 못 되어 황해도,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점차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고구마의 경우, 앞서 ⟪강저보⟫의 서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전라도 부안 지역까지 재배지가 확산되는 과정은 강필리의 재배법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실제 경작 과정에서 확보된 경험과 기술이 그대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민간의 지식이 쌓이며 테스트베드형 현장이 아닌, 생생한 생산 현장으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이 점은 고구마가 종자와 함께 획기적인 민간참여형 지식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한다. 나아가 사실상 전 농민 프로젝트로 승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마 종자를 다룬 농서를 보지도 못한 농민들이 고구마를 재배하고 널리 퍼뜨려 나갔던 것이다.


고구마는 불과 1, 2년 만에 서울과 삼남지방까지 확산되었다. 고구마의 탁월한 기능 때문이었다. 서울에서는 부유층 사이에 이국적인 기호작물이자 진미로 인식된 것과 달리 지방에서는 구황작물로 인식되고 재배된 점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고구마가 그만큼 탁월한 작물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강필리와 강필교 팀

강필리가 동래부사로 부임한 것은 52세인 1764년 8월 20일, 한양 내직으로 전출된 것은 54세인 1766년 11월 10일이었다. 1767년에는 대사간으로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고 그해 11월에 죽었다. 따라서 강필리가 동래부에서 고구마를 시험재배 및 증식할 수 있었던 것은 1765년 봄과 1766년 봄, 두 번뿐이다. 후임 부사로 가자마자 그는 조엄이 전해 준 고구마 프로젝트를 평생의 마지막 과제로 삼게 된다. 그렇다면 부사 시절 강필리는 고구마를 혼자서 재배하고 연구했던 것일까?


강필리의 시험재배 및 증식에는 동생 강필교가 실무를 도왔을 것이다. ⟪강씨감저보⟫는 조엄이 전해준 기본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강필교는 실무 책임자로 두 차례에 걸친 증식 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을 보완하여 형이 이 책을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종자와 함께 타지방으로 보냈다. 그 자신이 인지했든 하지 못했든 강필리는 죽음을 앞두고도 고구마 재배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러한 사실은 서유구의 ⟪종저보⟫ 및 ⟪만학지(晩學志)⟫ 감저(甘藷) 토의(士宜)조에 인용된 ⟪강씨감저보⟫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강필리는 자신이 직접 시험 재배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주관 하에 동생 강필교가 맡아 재배・증식하고, 이를 토대로 조엄으로부터 전해 받은 자료와 초량왜관을 통해서 입수한 대마도 자료를 보완하여 책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남저(고구마)는 강필교의 ⟪감저보⟫, 김씨(김장순)의 ⟪감저보⟫, 서유구의 ⟪종저보⟫ 및 일본에서 전해온 원보(原譜)가 있다”라는 대목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강필교가 만들었다는 ⟪감저보⟫가 바로 ⟪강씨감저보⟫이다. 강필교는 친형 강필리의 요청으로 고구마 증식작업에 관여했던 것이다. 프로젝트를 맡아 한 강필교의 탁월한 점은 종자를 제주도에까지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무 궤짝에다 흙을 담아 고구마 종자를 중앙정부 기관인 비변사에 보내며 재배법까지 알려준 점이다. 정부의 관심을 촉발시키고자 한 강필교의 이 같은 노력으로 고구마 프로젝트는 널리 알려진다.


1813년에 출간된 김장순의 ⟪감저신보(甘藷新譜)⟫는 보성에 사는 선종한이 김장순의 지원을 받아 9년간 재배, 증식, 가공하면서 터득한 비법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 당시 세간에 알려진 ⟪김씨감저보(金氏甘藷譜)⟫가 이것이다.

이 외에도 서호수의 ⟪해동농서(海東農書)⟫(1778), 이광려의 ⟪이참봉집⟫(1805), 서경창의 ⟪종저방(種藷方)⟫(1813), 서유구의 ⟪종저보(種藷譜)⟫(1834)와 저자 미상의 ⟪감저경장설(甘藷耕藏說)⟫도 나왔다. 이 책들은 고구마의 파종수확시기 및 재배에 알맞은 토양에 대해서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으로 분리 고찰한 것들이다. 1763년에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부산포로 급송한 후 1764년부터 강필리가 확산시키면서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현장지식의 총아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감저보⟫와⟪종저보⟫. 이 농서들은 조선후기 고구마 재배법에 대해 소상한 발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농업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혁신가들의 노력은 전국적 농법 지식 확대에 기여하며 조선사회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엄의 손자인 조인영(趙寅永)이 지은 ⟪운석유고(雲石遺稿)⟫에 실린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조엄이 1764년 6월 2차로 가지고 온 고구마 종자 중 일부가 바로 제주도로 보내져 1765년 봄부터 재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도 조엄이 일본에서 조사해 온 관련 자료가 함께 보내졌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널리 재배된 조엄의 고구마는 ‘조저(趙藷, 조엄의 고구마)’라고 불렸다. 이 무렵 고구마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친 소문이 돌았었는데, 전라도 부안에 사는 80대 노인이 꼽추병을 앓다가 고구마를 장기 복용하고 나자 병이 나아 정력이 좋아져 부인과 잠자리를 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그러자 고구마를 앞 다투어 구하여 매년 백여금을 벌어들이는 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몸에 좋다면 크게 인기를 끄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한편,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종저(種藷)⟩조에는 “고구마는 구황작물로 제일이다(甘藷爲救荒第一)”라고 하여 실학자들 사이에 이미 고구마를 구황작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정조는 비변사의 주청에 따라 대대적으로 농정을 진작시키고자 ⟪농정대전⟫을 널리 보급하도록 했다. 고구마 재배가 국가적 차원에서 권장된 국가 농정 프로젝트로 발전한 것이다. 특이한 사항은 뒤의 모든 농서들이 앞의 농서의 부족한 점, 새로운 임상 결과 등을 보완・보충하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구마 프로젝트의 의의 중 지식의 누적적 합산은 오늘날 지식을 생성해내고 키워가는 프로젝트의 연속성과 가상성(加上性) 면에서 큰 교훈이 된다. 우리가 아는 농서가 단순한 고문서가 아니라 생생한 지식 집적체임은 오늘날 고구마 재배과정이 선조들의 연구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모든 조직의 지식경영 원칙이 그러해야 하듯, 쌓아온 지식을 어떻게 더 풍요롭게 꽃피워 가는지가 늘 핵심인 것이다. 이 점에서 선조들은 고구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관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마와 감자

18세기 중엽 고구마가 중국 연경을 통해 조선 실학자들에게 전해질 때에는 감저(甘藷)라고 불렸다. 고구마가 조선 식자층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63년 조엄 전파 이전으로 명말 서광계가 저술하고 그의 제자 진자용이 1639년에 편찬한 ⟪농정대전⟫에 ‘감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데 기인한다. 이 책에서 서광계는 고구마의 장점을 12가지(十二勝)로 분석하고 있다.


첫 번째, 수입(소출)이 많은 것.

두 번째, 색은 희고 맛은 달아서 여러 토산 중에 특히 뛰어난 것.

세 번째, 사람을 돕는 것이 마와 효능이 같은 것.

네 번째, 땅에 두루 퍼져 옮겨가며 나와서 줄기를 잘라 심으면 올해 줄기 하나가 이듬해에는 수십

묘를 심을 수 있는 것.

다섯 번째, 가지와 잎이 땅에 붙어 있어 마디가 생기는 대로 뿌리가 나서 비바람에도 손상되지 않

는 것.

여섯 번째, 미곡을 대신할 수 있으면서 흉년에도 재해를 입지 않는 것.

일곱 번째, 제기(祭器)에 담을 과실 노릇을 할 만 한 것.

여덟 번째, 술을 빚을 수 있는 것.

아홉 번째, 말려서 오래도록 저장하여 자루를 내어 떡을 만들면 꿀을 쓴 것보다 나은 것.

열 번째, 날 것이나 익은 것이나 모두 먹을 만한 것.

열한 번째, 땅이 적어도 되고 물대기가 쉬운 것.

열두 번째, 봄・여름에 심었다가 초겨울에 거두어들이되 가지와 잎이 매우 무성하여 잡초나 더러운

것이 끼지 못하며 단지 흙을 북돋아주기만 하고 호미로 김매지 않아도 되어 농공(農工)의 작업에

방해되지 않는 것 등을 꼽고 있다.


이광려는 이 12승만 봐도 고구마는 가히 전천후 재배, 최대 생산 효익, 강한 적용력 등을 지닌 뛰어난 작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홍만선의 ⟪산림경제⟫,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정약용의 ⟪산림경제⟫, 박제가의 ⟪북학의⟫⟪증보산림경제⟫에 ‘감저’라고 알려진 것은 모두 고구마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감자는 마령서(馬鈴薯)로 불렸다.


그 외에도 고구마는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할 수 있다는 점, 대용식품으로 쓸 수 있다는 점, 단맛이 있다는 점 때문에 조선의 식자층으로부터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영・정조시기 농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각종 농서가 출간되면서 고구마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으나 종자를 구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조엄에 의해 부산포로 들어오고 강필리가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이후 고구마에 관한 각종 저술에서 한결같이 ‘감저’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1764년 봄 이응혁이 절영도에서 처음 재배를 시작할 때부터 부산포 주민들이 ‘고귀마’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부산포를 중심으로 확산된 ‘고구마’는 전국적 고유 명칭이 되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마령서(감자)가 조선에 들어 온 이후인 19세기 중반 고구마는 남저(南藷), 감자는 북저(北藷)로 불렀는데, 그 이유는 감자는 한냉지인 한반도 북부의 대표적 서류(薯類)작물이 되었고 고구마는 1763년부터 남부지방의 대표적인 서류작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반도 북부지방에서는 ‘감저’가 ‘감자’로 불린 것이다. 똑같이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감자와 고구마의 전래 루트와 시기는 각각 다르다. 특정 상품의 전달과정에서 복잡한 변수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경영은 해신海神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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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경영 리더인, 해녀. 그들은 어떻게 사업 환경에 적응하고 유리하게 환경을 이끌어 나가며, 바다를 경영할까? 나아가 환경을 소중히 여기고 지속가능한 경영 상태로 유지할까? 바다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를 보면, 사업 환경을 일구고 가꾸며 지속가능경영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친환경적 사업 환경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협력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가 다 함께 잘 사는 세상, 상생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기에 상생을 화두로 한 21세 경영과 맥이 닿아 있다. 그들의 오랜 물질에서 체득한 경영의 지혜는 무엇일까.


지속 가능한 사업 환경을 돌보라
바다를 가꾸는 해녀만큼  상생ㆍ상존의 조건을 잘 아는 경영 리더가 있을까

어느 산업분야든 해당 산업의 존립과 번영을 위해서는 이해관계자들의 공동노력을 필요로 한다. 비즈니스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독단적이고 무분별한 이익만 추구하다보면 고객이 외면하기 일쑤다. 시장도 줄어든다. 따라서 사업 환경을 고객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려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해녀들도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바다를 가꾸고 보살핀다.


해녀들에게 바다는 생활 터전이다. 바다에서 생계가 이루어지고, 바다를 밭으로 여기기 때문에 누구든 공동으로 바다를 가꾸고 돌본다. 그 예로 바닷가의 돌이나 바위에 돋아난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개닦기’라고 하는데, 주어진 경영 환경을 잘 가꾸고 보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원 활용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나아가 갯가를 깨끗이 닦고 청소함으로써 해산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준다. 이렇게 사업 생태계를 공동으로 유지하는 일은 공동 작업에 속한다.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닦기><사진자료: 해녀박물관>
 


바다 밑은 일반인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식용 해조류만 자라는 게 아니다. 먹을 수 없는 해초인 잡풀도 돋아나는데 가만히 놔두었다간 어느새 급속도로 번지며 식용 해초가 자라는 환경을 황폐화시켜 버린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엔 불가사리를 잡는 일도 포함된다. 불가사리는 왕성한 번식력으로 소라와 전복을 잡아먹는다. 가만히 놔두면 나중엔 바다 밑엔 쓸 만한 해산물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게 된다. 공동의 어장을 관리하고 잘 지키는 일은 이런 이유로 해녀 사회의 가장 큰 의무사항이다. 마치 기업이 지속가능한 경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업 기반을 가꾸는 것과 같다.


‘개닦기’와 함께 ‘투석’이라는 것이 있다. 투석은 해조류나 해산물이 파도에 떠밀리지 않고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만일 바다 밑에 모래만 있거나 자갈만 있다면 해조류는 서식할 수 없다. 여름 휴양지의 피서객에게는 하얀 모래밭 해변만큼 좋은 게 없지만, 해녀들에게 그런 모래밭은 바다의 사막이다. 사막화를 막는 작업이 바로 투석인 것이다. 바다에 돌덩이를 집어넣는 투석은 전복, 소라, 해조류 등이 집을 짓고 번식할 수 있도록 유리한 서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배에 돌을 싣고 나가 바다에 돌덩이를 인위적으로 집어넣는다. 그럼으로써 사업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관리한다. 투석을 하면, 바다의 생물은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마치 해녀들이 의지와 희망으로 삶에 뿌리를 내리는 것과 같다.


바다를 가꾸는 것에는 또 있다. ‘우미씨 뿌림’도 배를 타고 나가서 하는 작업 중 하나. 돌덩어리를 두덩어리씩 새끼줄로 묶고 틈새에 우뭇가사리를 끼워서 바다에 던져 넣으면 양식 효과를 가져온다. 전복과 소라 새끼를 공동자금으로 양식장에서 구입해 일정 해역에 뿌려 기른 후 잡는 식이다. 이 같은 종패사업은 마을 어장의 일정 지역에 어패류의 씨앗을 뿌려놓고 일정기간 자연 양식을 하는 것이다. 미래를 내다 본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친환경적 관리 태도인 셈이다.


바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가꾸지 않아도 유지되는 무한자원 보고가 아니다. 관리되지 않으면 바다도 황폐화 되고, 해녀들의 삶의 기반도 사라진다.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고, 지속적인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서도 친환경적인 노력은 더할 나위없이 중요하다. 해녀들의 노력이 단순히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을 채취나 하는 게 아닌, 보다 적극적으로 바다의 농사군인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느 조직이나 권리는 의무와 병행한다. 의무없는 권리를 주장하면, 원칙이 무너지며 조직이 설 곳이 없게 된다. 해녀 사회도 마찬가지다. 공동 작업엔 반드시 의무가 뒤따른다. 해녀로서 권리는 의무를 다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거져 얻어지는 것이란 없다. 의무 수행은 절대적이다. 해산물을 채취할 때는 결석해도 되지만, 개닥기에는 반드시 참석해야만 한다. 어느 누구건 이런 저런 이유로 불참할 때면 벌금을 내야 한다. 예외 없는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공동체 이익을 우선시 한다. 여기엔 바다를 풍요롭게 하는 모든 일들이 포함된다.  


현대 경영은 상생ㆍ상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느 누구를 경쟁에서 따돌리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공생 조건을 마련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더 큰 시장과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 기업이 나홀로 살겠다는 생각만 하거나, 과도한 자기욕망만 앞세운다면, 경영 시스템은 붕괴되고 만다.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촉발은 바로 과도한 욕망, 나만 살고자 하는 욕망이 빚어낸 결과다. 빌 게이츠 등 세계적인 경제 지도자들이 창조적 자본주의를 부르짖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해녀들이 뭍의 경영 리더들처럼 특별히 경영에 대한 개념을 배워서 이 같은 공존 원리를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상호 절제되고 상생하는 조건을 만들고 지켜나가는 것을 보면, 오늘날 얘기하는 친환경이니, 지속가능경영이니 하는 말들이 무색하다. 해녀들은 이런 공존의 원칙을 가장 험난한 바다에서 배운다. 그러기에 바다는 경영의 산 교과서일게 분명하다.    

   




<유채꽃과 해녀><사진자료: 해녀박물관>
바다에도 농사짓는 때가 있다. 봄에 해야 할 일이 있는가 하면 겨울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다 밭의 작물마다 생장하는 시기가 다르고 서식처도 다르기 때문이다. 뭍에서 농사를 짓듯, 해녀들은 계절마다 각기 바다밭을 가꿔야 한다. 제주바다에는 바다밭을 풍요롭게 해주는 바다생물이 무려 800여 종이나 있다. 남제주군 앞 바다에만 369종의 해조류가 산다. 해조류를 제외하고는 사시사철 채취한다. 해녀들을 바다밭을 가꿈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이것이 21세기 경영의 조건 아닐까.ⓒ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내 사업영역은 목숨을 걸고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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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업영역은 목숨을 걸고 지킨다

해녀 사회처럼 의무와 권리가 철저히 신뢰와 보상이라는 시스템으로 정착된 조직은 얼마나 될까


해녀집단에는 고유한 관행이 있다. 스스로 만든 규율을 법 이상으로 지켜나간다. 규율에서 벗어나면 아무리 친한 동료일지라도 철저히 규제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물질이 극성스런 마을일수록 규범이 더욱 세다는 점이다. 물에 드는 것에서부터 공동 어장을 관리하는 것까지 모든 게 적용된다.


해녀들이 물질을 위해 물에 뛰어드는 것을 ‘입어(入漁)’라고 한다. 물질하는 권리는 당연 ‘입어권(入漁權)’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오랜 기간 암묵적인 합의가 적용돼 왔다. 조직 내 암묵지가 규율로 정착된 것이다.


해녀의 입어권은 결혼 여부에 좌우된다. 미혼 해녀가 다른 마을 총각과 결혼할 경우에는 결혼하는 그날부터 입어권이 상실된다. 반대로 다른 마을 처녀가 시집오면 그날부터 입어권을 갖게 된다. 만일 이혼을 해서 친정으로 되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경우에는 입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바닷물에 뛰어들려고 할 땐 제재가 가해진다. 다른 해녀들이 아닌, 피붙이가 이를 가로막는다. 대개 이모나 고모가 그 해녀를 물에서 끌어내 테왁망사리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욕을 퍼부어 내쫓는다. 수모를 당하는 쪽도 울지만, 수모를 주는 해녀도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결국엔 가까운 피붙이가 하는 것이다. 멀리서 이 장면을 지켜보는 해녀들도 안쓰럽기만 마찬가지지만, 이런 규율은 반드시 지켜진다.


법적으로 이혼했을 경우엔 입어권이 회복된다. 다만 유예기간을 둔다. 약 2~3년을 두고 지켜본다. 다른 곳에 생활터전을 두고 가끔씩 마을에 와서 권리 행사만 하려 하는지, 마을 주민으로서 품행이 고운지 등이 판단 기준이 된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행동을 지켜본 후에 해녀들은 논의를 거처 입어권을 부여한다. 이처럼 물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야박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해녀 사회의 규율은 분쟁을 막는 긍정적 면이 있다. 권리 의무를 명확히 하자는 얘기다. 또한 좁은 섬의 정해진 자원에 의존하는 인구수를 줄임으로써 자원 활용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즉 적정 인원의 해녀를 유지함으로써 자원의 무차별적 채취를 막고, 일정 해녀들의 소득도 보장해 주려는 효율적 경제 시스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권리 의무와 경제 시스템은 물질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개 바다에서 한 사람의 작업공간은 대략 반경 약 5미터 내외이다. 물속이지만, 내 사업 영역은 철저히 정해져 있다. 물질하는 동안 다른 해녀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면 징계를 받는다. 영역 침범 행위를 ‘물숨 빼앗는다’고 하는데, 바람이 세거나 조류의 흐름이 예측불허라 본의 아니게 영역을 침범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고의일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 만일 상습범일 경우에는 1~2개월, 심하면 5개월 정도의 작업 정지 처분을 받는다.


잠수기선이 공동어장 내로 침범해 해산물을 채취해 갈 때에도 모든 해녀들이 뒤웅박을 타고 헤엄쳐 나가 잠수기선을 물리치는 것도 철저히 자신의 사업영역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해녀 사회는 자기 사업 영역이 철저하다. 결과적으로 시장은 균형을 맞춘다. 자신의 사업 영역을 나타내기 위해 해녀들은 무리지어 ‘테왁’의 색깔을 달리 표시하기도 한다. 같은 마을의 해녀라는 의미이다.


바다 밭은 넓기만 하다. 뭍과 달리 구획이 명백하지도 않고, 개인 소유도 아니다. 그러기에 공동선(共同善)을 위한 노력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마을 공동 재산이다 보니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의무부터 다해야 한다. 의무를 다한 해녀만이 자기 주장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인정받는다. 그만큼 솔선수범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심지어는 어장을 이웃마을에 빼앗기기도 한다. 만일 마을간 경계수면(境界水面)에 시체가 떠올랐을 때 이웃 마을에서 이를 처리했다면 그 수역은 그 마을의 어장이 된다. 요즘엔 바다를 측량하고 결과에 따라 바다경계를 확실히 획정하므로 분쟁이 없지만, 예전에는 심각하기만 했었다. 그 만큼 내 사업 권역을 지키는데 치열하다. 나아가 바다 밑 해산물을 절도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철저히 관리한다.


많은 기업들이 경영에서 나의 사업 권역, 시장점유율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보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익에 급급하다. 그러다보니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눈살을 찌뿌리게 하기도 한다. 출시제품의 리콜이나, 부도덕한 면이 밝혀지면 여론은 급격히 나빠진다. 1982년 타이래놀 독극물 주입사건이 발생했을 때, 존슨앤존슨은 고객과의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위기를 반전 기회로 삼았다. 고객들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기업으로 신뢰라는 보상을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선진 기업들은 대사회 공헌도를 기업의 윤리강령에 포함시키고 이를 지켜나가고 있다. 당장엔 비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인 이익을 보장하고, 기업 이미지가 제고되기 때문이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기업의 사회기여도는 보다 중요하게 평가받는다.



<바다밭 다툼>

바다는 망망대해일 뿐이어서 가시적 경계가 있을 수 없다. 예로부터 제주바다 공동어장의 경계선은 마을과 마을 사이의 경계를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하지만 마을과 마을사이의 경계선과 공동어장의 경계선이 일치하지 않아 분쟁의 요소가 되곤 했다. 게다가, 소라와 전복 등이 상품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경계바다에 대한 분규는 왕왕 벌어졌었다. 그러다보니 경계획정이 쉽지 않고 경계나 입어권을 두고 이웃끼리 싸움이 일었는데, 이를 ‘바당싸움’이라고 한다. 바다싸움에는 가깝게 지내는 친인척일지라도 진저리 칠 정도로 싸운다. 생존을 위한 생업에 대충주의는 없다. 기업들은 내가 장악한 시장을 지키려는 노력을 치열하게 한다. 그런데 시장의 가변성은 도덕성, 헌신과 연동돼 시장확대와 연결된다. 이 점에서 해녀 사회는 철저한 공헌도 중심의 사회인 셈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새롭고 남다른 등로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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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남다른 등로를 찾아

작아져서 비집고 들어가라. 거기서 새로움을 맞이할 것이다.


천길 낭떠러지 벼룻길(아래가 강가나 바닷가로 통하는 벼랑길)을 헤쳐 나갈 때, 된비알(몹시 험한 비탈)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를 때, 너설(험한 바위나 돌 따위가 삐죽삐죽 나온 곳)을 조심스럽게 지나 갈 때, 몸 하나 간신히 붙이고 자드락길(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좁은 길)을 건널 때, 어녹고 있어 휘딱이게 되는 얼음길을 내디딜 때 우리는 그 길이 탐탁지 않아도 길이라 부르며 걷는다.


길을 탓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길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지나갔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누군가가 통과한 길을 두고 길을 탓한다면 그건 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길을 만나면 그 길이 어떻든 반가이 맞아야 한다. 성난 길, 화난 길, 뿔난 길, 모난 길, 굽은 길, 막힌 길, 성한 길, 무너진 길 모두 감사할 따름이다. 특히 자신의 길을 놓아야 하는 산꾼 경영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인생과 사업은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누가 놓아준 길이든 길이 있으면 마냥 고맙다. 그 길을 걸으며 산꾼 경영자는 자신의 길을 새롭게 놓는다.


산 위보다 산 아래에서 생존의 길을 놓아야 하는 경영자들은 탄탄대로는 아니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어떤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가시밭길도 헤치고 막힌 길도 뚫고 간다. 없는 길은 놓으며 간다.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지닌 의지, 헤쳐 나가려는 전략은 늘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늘 뻥 뚫린 길만 앞에 놓여 있다면 무슨 감흥이 일겠는가? 간신히 손톱 하나 걸칠 수 있는 가파른 절벽에 몸을 의지하며 쉼 없이 가야 투지도 더해지는 법이다. 그래도 내가 겪은 어려움이 후발주자에게도 똑같이 진입장벽이 되어준다면 그만한 고생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독점적으로 먹을 수 있는 과실이야말로 가장 달콤한 것 아닌가!


암벽등반을 하듯 자기분야에서 온갖 간난고초 끝에 사업을 일궈낸 홍대웅 사장은 깎아지른 절벽을 보면 달라붙고 싶어진단다. 그리고 어디 비빌 틈이라도 있으면 그걸 붙잡고 오르기부터 한다. 허공을 밟고 올라가라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 아니냐고 말할 정도다. 참으로 사업을 악착같고 억척스럽게 일궈낸 사장다운 투지다.





“사업이라고 하면 모두들 거창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사업은 대로(大路)를 지나는 게 아닙니다. 소롯길이나 개미 하나 지날 만한 길 같지도 않은 길을 간신히 통과해 정상까지 오르는 겁니다. 쑤시고 비집고 들어가는 거죠. 없는 틈도 만들어내야 하고 빈틈은 용케 찾아내야 합니다. 실오라기 하나라도 통과할 만한 틈이 있다면 닫히기 전에 잽싸게 틈입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업의 길을 뚫어나가는 겁니다. 대기업이 기술과 자본력으로 방어벽을 친 모든 사업 영역에서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눈 시퍼렇게 뜨고 아주 가는 길이라도 놓아야 합니다. 그 길에 새로운 기술, 아이디어, 비즈니스 모델을 힘차게 박아 넣어야 합니다. 호시탐탐 경쟁사가 머물고 졸 때를 기다려 조용히 침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정상에 진입하고 나면, 더는 오합지졸로 보지 않게 될 겁니다. 승리하기 위해선 피터지게 싸워야 하죠. 조그마한 바위조각이라도 붙잡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사니까요.”


대기업에 다니다 10년 전에 창업한 그는 막상 대기업에서 나오고 보니 대기업의 울타리가 보통 높은 게 아니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밖으로 나오자 자신이 온갖 방어벽이 둘러쳐진 곳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안에서 배운 것으로 안을 공략해야 하는, 안의 틈새를 치고 들어가야 생존할 수 있는 사업목표가 그 앞에 숙명처럼 놓였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지 않으면 밥은 고사하고 절벽에 매달려 죽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안에서 배운 것은 안을 이해하고 도모하는 데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특허의 장벽을 넘어서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험난한 등로를 오르는 과정과도 같았다. 그는 3년 넘게 관련 특허를 분석해 가까스로 두터운 암벽을 타고 넘어갈 루트 하나를 개발했다.


“그 촘촘한 특허의 그물에 그만한 개미구멍이 있으리라고는 상대 회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너무 좁은 틈이라 간과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전 세계에 특허 등록을 하고 기술개발에 들어가 상용화했을 무렵, 대기업은 득달같이 특허 침해 소송을 걸어왔다. 홍 사장은 방어 전략을 펴 가까스로 합의에 이르렀고, 특허를 상호 교차해 사용할 수 있게 범위를 넓혔다. 그제야 하청업체로도 받아주지 않던 대기업은 홍 사장을 당당한 파트너로 인정했다. 당연히 매출도 뒤따랐다.


“만일 내가 그 등로에서 편한 길을 택했다면 아예 진입조차 못했을 겁니다. 찾아가서 아쉬운 소리 해봐야 문전박대당할 게 뻔했죠. 기술 분야에선 특허라도 걸어놔야 어느 정도 교섭력이 생깁니다. 그러니 철벽을 뚫고 들어갈 각오로 임해야 합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은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아요. 그럴 땐 직원들과 함께 마른하늘만 쳐다보게 됩니다. 고사목처럼 말라죽게 되는 거죠.”


이 악물고 일궈낸 그의 사업은 안정궤도에 진입했고 그는 더 큰 산을 오르려 준비 중이다. 기술 기반 사업에서는 작은 산, 즉 가까스로 쌓아올린 산에 머물다간 누군가가 자신을 늘 주시하고 내려다보는 것 같아 발을 편히 뻗고 잘 수 없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 경쟁자가 더 뛰어난 기술로 휩쓸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한시도 떨쳐낼 수 없다.


“산에 오르고부터 대기업 장벽이 아무리 높아도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산은 그대로 있지만 내가 쌓은 산은 점점 자라게 될 테니까요. 내겐 그런 믿음과 확신이 있었죠.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어요. 만약 이 사회가 공정한 룰을 적용한다면 그건 얘기가 좀 다릅니다. 지금 바라보는 세상은 내가 시작할 때와 전혀 다릅니다. 나는 암벽에 몸을 붙인 채 내 거점을 확보했고 저들이 방심하기를 늘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저들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나를 내려 보겠지만, 그 높이는 점차 달라질 겁니다. 내가 매일 목이 부러져라 저쪽을 응시하고 있거든요. 그들은 나를 낮은 데서 춤추고 있는 불나방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언젠가는 내가 그들을 내려다보는 날이 꼭 올 겁니다. 이 손을 보세요.”


그가 내민 손은 두꺼비 등처럼 두툼했다. 더욱이 바위틈에 짓이겨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손으로 무엇이든 못할 게 없다고 말했다. 내가 ‘산꾼으로 다져진 손’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때, 그가 내 뒤를 치는 말을 흘렸다.


“죽어라고 제품 만들며 고생할 때 그만 실험용 알코올 병이 터지면서 불에 그슬린 상첩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의 화력을 가장 크게 높였고 내 몸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룬 산이 더 큰 산에 가려지는 게 아닌, 석양을 받아 붉게 타오르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죠.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생과 사업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등 뒤로 석양이 불을 뿜어대며 눈부시게 빛났다. 우리는 오래 전에 폐쇄되었다가 최근에 개방된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곳에는 새로운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바닷가의 물건은 줍지도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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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물건은 줍지도 마라

해녀들의 바다사랑은 환경 보전을 주창하기 전에도 ‘자연경영’으로 자리매김 됐다

 

지구가 공전하고 자전하는 한, 어떤 경우든 파도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그 파도에 실려 바닷가에는 온갖 표류물이 실려 온다. 언필칭, 바다의 퇴적물이라 할 수 있다. 난파한 배의 목재에서부터, 잡다한 물건은 물결에 떠다니다가 해변에 와서 쌓인다. 주인도 없는 그것들 중에는 쓸만한 물건도 있다. 간혹 주워가고 싶은 유혹이 생길 건 당연하다. 하지만 해녀는 ‘바닷가의 물건은 줍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왜 그럴까? 해양의 쓰레기는 파도에 떠밀리며 부패되기 쉽다. 자칫하다간 원인도 모를 병원균에 감염될 수도 있다. 게다가 주인 없는 물건일지라도 함부로 취하지 않는 해녀세계의 철두철미한 윤리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없다고 생각해 물건을 주었다가 시비가 벌질 수도 있고, 이로 인해 적잖은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남의 물건에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다.

 

경영 리더의 도덕성과 자기 절제는 필수 덕목이다. 이것이 모자라거나 흐릿해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해녀사회는 취하지 말아야 할 물건에 대해서는 터부시 한다. 예컨대, 해변에 와 쌓인 목재를 집으로 가져오거나 이걸 이용해 집을 지으면 ‘동티가 난다’고 한다. 난파선의 목재를 가져다가 불을 때면 ‘조왕이 거꾸로 선다’고도 한다. 배의 수호신은 ‘서낭(船王)’이라고 하는 여신이다. 반면, 집을 수호하는 여신은 ‘조왕(竈王)’이다. 이 두 여신이 서로 맞서게 되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며 집안이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민간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윤리를 지키려고 하는 대목이 더욱 흥미롭다.

 

또한 바다에서 돌을 가져오면 안된다는 금기도 철저히 지켜진다. ‘바다에 있는 돌로 집을 지으면 망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다. 바닷가의 돌은 바다생물이 서식하는 주요 환경이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자연을 보호하고자 투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돌을 반출하면 자연 환경은 파괴되고, 생태계는 무너진다. 돌 채취를 강하게 금지하는 것은 해녀들과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외부인에게도 요구된다. 수석이나 정원석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돌을 실어 나르다 한바탕 난리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장이 황폐해 지는 것을 막고, 가장 친환경적으로 생업의 터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유네스코(UNESCO)는 해녀를 ‘사라질 위험이 있는 직업’으로 규정하며 사회유산으로 등재했다. 이 이유는 해산물을 채취하는 직업인으로써의 위상 때문이기보다는 “스스로 과도한 어업에 대해 통제하는 본질적인 정신을 갖고 있으며, 환경 파괴에 즉시 반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만큼 인류 공동의 자원에 대해 친환경적 마인드를 지닌 직업군으로 보기 때문이다. 환경문제와 자원고갈이 날로 심각해지는 때에 해녀들의 자연과의 조화로움은 충분히 배울 점이 된다. 요즘의 기업들이 탄소배출권을 사야하고, 환경을 오염할 때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윤 추구의 지속성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해녀들은 이미 환경문제가 부각되기 오래 전부터 자연 경영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해녀뿐만 아니라, 뭇 생명체들의 삶의 터전이다. 바다의 주인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인간이나, 자연의 뭇 생물 모두에 해당된다. 해녀들이 바닷가에서 탐나는 물건일지라도 줍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물건에 혹시 있을지 모를 감염원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본업을 떠나 자기 노력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고자 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생태계를 보전키 위한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혜이다. 그래서 해녀들의 바다사랑은 환경 보전이 시급한 지금 더욱 빛을 발한다. copyrights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사업은 타이밍과 직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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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은 타이밍과 직결되어 있다

해녀들은 사업의 시간을 무엇보다도 중요시 한다. 경영은 이다

 

기업의 속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금, 적잖은 기업들이 해외 진출 시 돈과 시간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시간을 선택한다. 자원이 좀 더 들더라도 정해진 시간 내 시장에 진입하지 않으면 남들이 수확하고 간 논에서 떨어진 벼이삭이나 줍는 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장 진입 시기는 중요하다. 후발로 뛰어들면 마케팅 비용을 퍼부어도 기대한 효과를 보기 어렵다. 먼저 들어가면 리스크는 있지만, 선발자의 혜택을 고스란히 본다. 후발 주자들이 시장을 쟁취하고자 10배 이상 마케팅 비용을 퍼부을 때, 선발주자들은 느긋하게 대고객 서비스를 강화해 나갈 수 있다.

 

그러며 시장에서 이미 다져진 경쟁력을 기반으로 인접 시장으로 야금야금 넓혀갈 수 있다. ‘시간=이라는 등식은 어느 경우에나 적용된다. 비즈니스에서처럼 물질 나가는 해녀들에겐 조수간만의 차에서 오는 사업의 시간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해녀들은 물때를 어질리지 말라는 말을 헌법 제1조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 사업이 그렇듯 모든 건 때가 맞아야 한다. 비즈니스도 실기(失機)하면 뛰어들지 못하느니만 못하다. 때를 아는 건,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해녀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썰물 때가 가까워지면 해녀들은 하던 밭일도 중단하고 집으로 달려가 바다 갈 채비를 서두른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손님은 물질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시 찾아와야 한다. 결정적인 시간과의 조우를 양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때 어질리지 말라는 말은 물질에 나서는 해녀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에게도 하나의 에티켓이 된다. 해녀가 바다에 가는 시간대에 방문하는 것도 비즈니스 에티켓에 벗어나는 것이며, 물질 나가는 해녀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도 금기사항이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좋지 않은 소식은 작업이 끝난 다음에 전해야 한다. 심적 갈등을 유발하면 물질에 집중할 수 없고, 그러다보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비즈니스 공략 시점을 존중하는 것은 상호간에 룰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은 상존에의 조건이 된다. 룰이 무너지면, 관계조차 원만하게 형성되기도 어렵다. 바로 이 점이 해녀 사회를 구성하는 든든한 밑바탕이 된다.

 

어느 기업이나 욱일승천의 기회를 이런 저런 이유로 놓치다보면, 이래저래 손실이 발생하고, 후회막급이다. 기화가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다. 핵심에의 집중, 시간과의 다툼, 기회 앞에서 주도적인 태도, 우선순위에 대한 전략적 접근 같은 경영의 원리를 해녀들은 물때를 대하는 자세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물때는 오늘날 기업들의 경영의 시간과 연장선상에 있다. 타이밍도 중요하다. 적시는 적기의 의사결정을 요구한다. 물질은 목숨을 내걸고 하는 일이기에 한번 까딱 실수하면 목숨과 맞바꿔야 한다. 과도한 욕심을 제어하는 것도, 숨을 참을 수 있는 2분내 목적을 이루는 것도 모두 적기적시의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해녀들은 타이밍과 관련된 시간경영에 민감하다. 시간내 목표시장에 진입하고, 소기의 성과를 내야하는 측면에서 보면 기업 경영내지는 기업의 의사결정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더 철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이순신 수군, 구체적 성과를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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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수군, 구체적 성과를 내다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보고 밀린 육전과 달리 이순신이 이끈 바다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조선 육군이 막지 못한 일을 수군이 해낸 것이다. 장군은 전쟁이 일어난 임진년 5월에는 당포, 옥포, 사천 전투를, 한 달 뒤인 6월에는 당항포, 율포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율포해전은 특히 장군 스스로 장계에서 여러 전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마음이 상쾌했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는 걸로 봐서 깔끔한 승리로 마무리된 전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 7월에는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해전에서 적을 수장(水葬)시켜 버렸다. 한산도로 본영을 옮긴 것은 이듬해인 15932월 웅천와 제포에서 승리를 거두고 남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이었다. 부산을 거점으로 거제도까지 본거지로 삼은 적의 서해 항로를 봉쇄키 위해 옮긴 곳이 이곳 한산도이다. 한산도는 자칫하면 적의 전진 기지인 거제도와 너무 가까워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수군이 이곳을 지키는 한 적은 서해를 통해 경기, 서울로 진격해 들어갈 수 없었다. 반대로 적으로선 이곳을 장악하지 못하면 서해 진출은 고사하고 부산까지 잃을 수 있었다. 양쪽 다 반드시 장악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한산도의 전략적 가치: 길목을 지켜라

  

 

한산도는 적이 전라도를 거쳐 서해를 통해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는 수전(水戰)의 최전선이었다. 육지로 보면 진주나 구례와 같이 다른 도로 넘어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장악하느냐 못하느냐는 여부는 전체 전쟁의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글로벌 경쟁 하에서 기업들은 한산도와 같은 전략적 거점이 어디일지를 묻게 된다.

 

 

장군은 15938, 당시 편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무렵 한산도로 진영을 옮긴다. 이때부터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1597226일까지 37개월 동안 이 섬에 진영을 펼친다. 장군은 이곳에서 난중일기1,491일 분의 중 1,029일의 일기를 썼고 많은 시를 남겼다. 장군이 체취가 가장 많이 배어 있는 섬이다. 나는 이 섬에서 우리 역사가 죽고 살았던 치열함을 온 몸으로 느낀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생활 모습. 장군은 이곳에서난중일기1,491일 분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1,029일의 일기를 썼고 많은 시를 남겼다. 오늘날 우리가 장군의 면면이나 임진왜란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장군이 남긴 철저한 기록정신 덕분이다.

 

    

  난중일기: 치열한 기록 정신의 정수

  

   

장군의 활동 중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일과 그 처리 과정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난중일기는 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부터 전사하기 전까지 7년 동안 전쟁 중에 있었던 일을 적어 놓은 30여만 자의 기록이다. 장군의 행적과 시문, 비명(碑銘) 등 여러 가지 관계기록을 집대성한 귀중한 책이다. 세계역사상 지휘관이 직접 쓴 전쟁일기와 전쟁보고서[장계]로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공을 세운 부하들을 빠짐없이 기록함으로써 전승의 공이 자신만의 힘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힘으로 이룬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난중일기라는 혁신 기술서에는 3번의 파직과 2차에 걸친 투옥 및 백의종군의 아픔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기록을 남기며 장군은 지도자로서 역량을 키우고 끊임없는 자아성찰의 계기로 삼았을 것이다. 일종의 자가(自家) 피드백 장치였던 셈이다. 기록을 통해 자기혁신을 이뤄낸 장군의 리더다운 모습은 기록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거북선에 대한 기술이 불과 700여자의 짧은 요약에 불과하고 구조제원에 관한 기록은 불과 400여자여서 이순신 귀선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장군이 삭탈관직 되어 한양으로 이송된 15961012일부터 1597330일까지 5개월여의 일기가 없고, 159815일부터 914일까지의 일기가 빠져있다. 뒤의 무술년 일기는 분실된 것일 수도 있고, 장군이 몸져누운 날이 많아 일기를 쓰지 못한 것일 수도 있으나 아직까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장군이 쓴 이 7년 전쟁의 기록은 1793(정조 17) 정조가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서 비롯된다. 전서 권5로부터 권8에 걸쳐 일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현재 국보 76호로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고 있다. 장군에게 영의정이 추증된 것은 전서가 출간된 지 2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지금은 지나가는 나그네도 다도해의 비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갓 무친 회와 굴에 소주 한잔으로 회포를 풀고 싶은 곳이지만, 장군이 바라보았던 한산도의 밤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치열한 경계지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적의 동정을 살핀 장군에겐 불면의 밤만이 벗이 되어 주었으리라. 나는 통영이 배출한 시인 이은상이 읊었듯, ‘귀로 듣다 못해 앞가슴 열어젖히고 부딪혀 보는 저 바다앞에서 장군의 초심을 되새기며 장군의 체취를 느낀다. 이순신은 누구인가? 그는 오늘날 경영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대장부 태어나서 쓰임을 받으면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요, 쓰임을 받지 않으면 밭을 갈아도 족하리라. 권세에 아부해 한때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나의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다.

 

대장부 이순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장군의 평소 삶의 철학이기도 한 이 말은 이순신이란 존재를 아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순신은 진실로 조선의 대장부였다. 대장부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이 가득 찼으되 비었으며, 비었으되 가득 찬 기개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따라 배우고 싶은 장군의 이런 면이 무엇보다도 좋다. 대장부의 기개와 분발심이 자연히 가슴에 인다.

그러고 보니, 한산정은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곳이며 표적과의 거리가 145m이다. 현충사 옛집에서 본 활터와 과녁의 거리도 140m 아니던가. 바다에서는 거리 감각이 없으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활 쏘는 곳과 과녁을 배치해 활터로 개발했다. 한산도 활터에 가보면 완벽한 준비 태세를 추구하는 장군의 계획이 그대로 읽힌다.

장군은 수많은 기습공격으로 적의 야욕을 좌절시켰지만, 한 번도 적에게 기습 공격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기본에 충실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본은 전략을 공고히 하는 주요 수단으로 지속해서 작용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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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해전: 성공 혁신을 재혁신의 기회로 삼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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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해전: 성공 혁신을 재혁신의 기회로 삼아라

 

승리를 재혁신의 기회로 삼으면 더 큰 승리이자,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승리에 이르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일회성 승리로 끝나고 만다. 어느 기업이나 한 때는 잘 나갔었던 때가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성공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자세이다. 부산포해전은 재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매우 뜻 깊은 전투이다. 장군은 성공적인 혁신을 안주가 아닌, 재혁신의 기회로 삼았다.

 

부산포 해전은 1592824일부터 92일까지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부산포 등지에서 치러진 전투를 말한다. 이 해전에서 장군은 적선 152척을 격침시키고, 6척을 불태운다. 이 해전은 이순신에게 과거의 전투를 돌아보고 이를 보완하는 계기가 된다. 지금까지 3차에 걸친 해전에서 연전연승하고, 귀항 후 그간의 작전 수행결과를 반영해 전쟁 준비에 온 힘을 기울인 해전이라서 그렇다.

 

특히 여러 번 출전에서 항상 군량이 부족해 먼 거리를 다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점을 되새겨 장군은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비상용으로 비축해 두었던 군량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을 받는다. 또 해상에서 패전한 적이 육지로 도주함으로써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에게 수륙합동 공격을 제의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도 동시 출전의 약속을 받아낸다. 여수 앞바다에서 전라좌우도 함대를 합동으로 편성해 81일부터 훈련과 정비를 실시한 후에야 장군은 출전했다. 그 점에서 철저히 준비된 전투였다. 준비를 했다지만, 이때도 적과 아군의 전선 수는 3:1로 아군은 숫적인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군은 적을 선제기습공격하여 부산 선창을 향해 총공격의 명령을 내렸다. 함대는 장사진(長蛇陣, 종렬진)’을 형성하며 포구로 돌진하여 적선 4척을 격파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대형을 원용한 것이다.

 

이 부산포 해전은 장군이 출전한 해전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전투였다. 적이 육지의 높은 언덕에 올라가 지상전투에서 노획한 아군의 편전(片箭), 대철환(大鐵丸), 수마석(水磨石)을 발사하며 저항한 탓에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가 생긴 것이다. 이 전투에서 장군은 너무나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한다. “적군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느냐?”며 비분강개해 이순신을 떨쳐 일어서게 했던 녹도만호 정운을 잃은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쉰, 아까운 장수의 전사였다.

 

이 전투를 통해 장군은 육군의 지원을 받지 않는 한 적을 격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큰 의미가 있었으니, 3차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비점을 보완해 출전한 점이다. 또한 전라·경상우수사, 조방장 등과 작전을 상의하고 토론했으며, 탐망선을 운용해 지역 주민들로부터 정보를 획득한 점이다. 작전 계획에서는 집권화를 이루고, 실행 면에서는 분권화를 이루었다. 이는 조직의 의사결정력과 실행력을 절묘하게 결합해 전술운용의 효과성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 조선수군은 드디어 남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왜의 보급로를 끊어 버린다. 이로써 전쟁 이후 1년여의 시간이 지난 1593년 초부터 아군은 각 전선에서 전면적인 반격으로 이행하는 재혁신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5차 출전(웅포), 6차 출전(당항포), 7차 출전(장문포, 영등포) 등은 부산포 해전 성과의 확대재생산 과정이었다. 이처럼 재혁신은 중요했다.

 

오늘날 포춘 50대 기업을 살펴보면, 잘 나갔던 기업들도 95퍼센트 정도가 정체를 경험한 바 있다. 기업은 창업, 성장, 성숙, 재구축의 일련의 과정에 놓여 있다. 성숙 이후 재구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장과 추락의 기로에 놓인다. 인식의 덫에 갇혀 기존 사업의 방식에 빠지거나 시너지에 과도한 집착을 하다보면 위험요소만 높아간다. 또 과도할 정도로 숫자의 유혹에 빠져 목표, 기대치 및 자신의 역량을 과신함으로써 오만의 함정에 빠져 들 수도 있다. 시장 기회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도 기회와 위험요인이 공존하기에 항시 경계되어야 한다. 제조업의 교과서라고 불리던 일본 토요타자동차의 좌절이 이를 잘 보여준다. 토요타는 과거의 성공방식인 과도한 효율성 만능주의에 빠져 계속 같은 방식을 강화한 결과 공용화 부품에서 품질 문제를 야기하고, 과도한 해외생산 능력의 확충 및 원가절감 면에서 추락하며 위험에 빠졌다. 현재 전 세계 40억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는 휴대폰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80년대 휴대폰 시장을 석권한 압도적 1위 업체는 모토로라였다. 당시 시장점유율이 60퍼센트에 달할 정도였다. 이런 모토로라가 맹주 자리를 내놓게 된 배경은 기술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데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이 쇠락의 원인이 됐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 온 회사가 노키아였다. 노키아는 저가형 디지털 휴대폰으로 개인휴대전화의 대중화 시대를 열어젖히며 일대 기린아로 등장했다. 그러나 강자로 군림했던 노키아도 2000년 초 휴대폰 시장이 디지털 컨버전스로 변화할 때 뒤늦은 대응으로 삼성전자에 혁신의 주도권을 내준다. 삼성은 단숨에 글로벌 톱3 업체로 도약했다. 반면, 노키아는 바(bar) 타입의 저가폰을 고수하며 시장점유율이 20퍼센트 대까지 추락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노키아는 2000년대 중반 플랫폼 전략을 통해 저원가로 다변화된 시장수요를 창출하며 다시 시장점유율을 40퍼센트대로 끌어 올려 1위 자리를 공고히 했다. 그리하여 20093분기가 되면 세계 휴대전화 점유율(대수기준)상 노키아 37.8%, 삼성전자 21.0%, LG전자 11.0%, 소니 에릭슨 4.9%, 모토로라 4.7%로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이들 밑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최강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플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애플의 등장과 함께 이들 기업의 혁신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시장은 급전환 된다.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의 진화를 지켜보며 깨닫게 되는 게 있다. 모든 혁신 기업은 주도기업이 기존의 사업방식과 성공모델을 고수하고 있을 때 획기적으로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놓는 놀라운 혁신을 통해 기존 시장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노키아도 2009년 크게 흔들렸고, 삼성도 애플에 발목이 붙잡힌 것은 이 때문이다. 변화의 시기에 창조적 도전과 뼈를 깎는 혁신의 노력을 하지 못한 기업은 변화의 크레바스에 빠지며 사라지게 된다는 교훈을 여실히 보여준다. 반면에 다른 분야의 강자들, 예컨대 IBM, Intel, P&G 등은 성장과 정체를 반복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재혁신 기반을 구축했기에 초일류기업으로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순신 혁신을 통해 오늘날 기업들은 지속혁신이 지속가능경영의 전제조건임을 알게 된다. 부산포해전에서 장군의 재혁신 체제 구축은 이후 전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부산포해전: 성공 혁신을 재혁신의 기회로 삼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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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해전: 성공 혁신을 재혁신의 기회로 삼아라

 

승리를 재혁신의 기회로 삼으면 더 큰 승리이자,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승리에 이르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일회성 승리로 끝나고 만다. 어느 기업이나 한 때는 잘 나갔었던 때가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성공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자세이다. 부산포해전은 재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매우 뜻 깊은 전투이다. 장군은 성공적인 혁신을 안주가 아닌, 재혁신의 기회로 삼았다.

 

부산포 해전은 1592824일부터 92일까지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부산포 등지에서 치러진 전투를 말한다. 이 해전에서 장군은 적선 152척을 격침시키고, 6척을 불태운다. 이 해전은 이순신에게 과거의 전투를 돌아보고 이를 보완하는 계기가 된다. 지금까지 3차에 걸친 해전에서 연전연승하고, 귀항 후 그간의 작전 수행결과를 반영해 전쟁 준비에 온 힘을 기울인 해전이라서 그렇다.

 

특히 여러 번 출전에서 항상 군량이 부족해 먼 거리를 다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점을 되새겨 장군은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비상용으로 비축해 두었던 군량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을 받는다. 또 해상에서 패전한 적이 육지로 도주함으로써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에게 수륙합동 공격을 제의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도 동시 출전의 약속을 받아낸다. 여수 앞바다에서 전라좌우도 함대를 합동으로 편성해 81일부터 훈련과 정비를 실시한 후에야 장군은 출전했다. 그 점에서 철저히 준비된 전투였다. 준비를 했다지만, 이때도 적과 아군의 전선 수는 3:1로 아군은 숫적인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군은 적을 선제기습공격하여 부산 선창을 향해 총공격의 명령을 내렸다. 함대는 장사진(長蛇陣, 종렬진)’을 형성하며 포구로 돌진하여 적선 4척을 격파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대형을 원용한 것이다.

 

이 부산포 해전은 장군이 출전한 해전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전투였다. 적이 육지의 높은 언덕에 올라가 지상전투에서 노획한 아군의 편전(片箭), 대철환(大鐵丸), 수마석(水磨石)을 발사하며 저항한 탓에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가 생긴 것이다. 이 전투에서 장군은 너무나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한다. “적군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느냐?”며 비분강개해 이순신을 떨쳐 일어서게 했던 녹도만호 정운을 잃은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쉰, 아까운 장수의 전사였다.

 

이 전투를 통해 장군은 육군의 지원을 받지 않는 한 적을 격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큰 의미가 있었으니, 3차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비점을 보완해 출전한 점이다. 또한 전라·경상우수사, 조방장 등과 작전을 상의하고 토론했으며, 탐망선을 운용해 지역 주민들로부터 정보를 획득한 점이다. 작전 계획에서는 집권화를 이루고, 실행 면에서는 분권화를 이루었다. 이는 조직의 의사결정력과 실행력을 절묘하게 결합해 전술운용의 효과성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 조선수군은 드디어 남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왜의 보급로를 끊어 버린다. 이로써 전쟁 이후 1년여의 시간이 지난 1593년 초부터 아군은 각 전선에서 전면적인 반격으로 이행하는 재혁신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5차 출전(웅포), 6차 출전(당항포), 7차 출전(장문포, 영등포) 등은 부산포 해전 성과의 확대재생산 과정이었다. 이처럼 재혁신은 중요했다.

 

오늘날 포춘 50대 기업을 살펴보면, 잘 나갔던 기업들도 95퍼센트 정도가 정체를 경험한 바 있다. 기업은 창업, 성장, 성숙, 재구축의 일련의 과정에 놓여 있다. 성숙 이후 재구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장과 추락의 기로에 놓인다. 인식의 덫에 갇혀 기존 사업의 방식에 빠지거나 시너지에 과도한 집착을 하다보면 위험요소만 높아간다. 또 과도할 정도로 숫자의 유혹에 빠져 목표, 기대치 및 자신의 역량을 과신함으로써 오만의 함정에 빠져 들 수도 있다. 시장 기회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도 기회와 위험요인이 공존하기에 항시 경계되어야 한다. 제조업의 교과서라고 불리던 일본 토요타자동차의 좌절이 이를 잘 보여준다.

 

토요타는 과거의 성공방식인 과도한 효율성 만능주의에 빠져 계속 같은 방식을 강화한 결과 공용화 부품에서 품질 문제를 야기하고, 과도한 해외생산 능력의 확충 및 원가절감 면에서 추락하며 위험에 빠졌다. 현재 전 세계 40억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는 휴대폰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80년대 휴대폰 시장을 석권한 압도적 1위 업체는 모토로라였다. 당시 시장점유율이 60퍼센트에 달할 정도였다. 이런 모토로라가 맹주 자리를 내놓게 된 배경은 기술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데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이 쇠락의 원인이 됐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 온 회사가 노키아였다.

 

노키아는 저가형 디지털 휴대폰으로 개인휴대전화의 대중화 시대를 열어젖히며 일대 기린아로 등장했다. 그러나 강자로 군림했던 노키아도 2000년 초 휴대폰 시장이 디지털 컨버전스로 변화할 때 뒤늦은 대응으로 삼성전자에 혁신의 주도권을 내준다.

 

삼성은 단숨에 글로벌 톱3 업체로 도약했다. 반면, 노키아는 바(bar) 타입의 저가폰을 고수하며 시장점유율이 20퍼센트 대까지 추락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노키아는 2000년대 중반 플랫폼 전략을 통해 저원가로 다변화된 시장수요를 창출하며 다시 시장점유율을 40퍼센트대로 끌어 올려 1위 자리를 공고히 했다. 그리하여 20093분기가 되면 세계 휴대전화 점유율(대수기준)상 노키아 37.8%, 삼성전자 21.0%, LG전자 11.0%, 소니 에릭슨 4.9%, 모토로라 4.7%로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이들 밑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최강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플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애플의 등장과 함께 이들 기업의 혁신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시장은 급전환 된다. 이 처럼 경쟁은 엎치락 뒤치락한다.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의 진화를 지켜보며 깨닫게 되는 게 있다. 모든 혁신 기업은 주도기업이 기존의 사업방식과 성공모델을 고수하고 있을 때 획기적으로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놓는 놀라운 혁신을 통해 기존 시장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노키아도 2009년 크게 흔들렸고, 삼성도 애플에 발목이 붙잡힌 것은 이 때문이다. 변화의 시기에 창조적 도전과 뼈를 깎는 혁신의 노력을 하지 못한 기업은 변화의 크레바스에 빠지며 사라지게 된다는 교훈을 여실히 보여준다. 반면에 다른 분야의 강자들, 예컨대 IBM, Intel, P&G 등은 성장과 정체를 반복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재혁신 기반을 구축했기에 초일류기업으로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순신 혁신을 통해 오늘날 기업들은 지속혁신이 지속가능경영의 전제조건임을 알게 된다. 부산포해전에서 장군의 재혁신 체제 구축은 이후 전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임진왜란 관련 각종 지도>

 

 

 

 

 

 

 

 

 

 

 

 

웅포해전: 전투수행을 위한 협력체계를 강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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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포해전: 전투수행을 위한 협력체계를 강화하라

 

부산포 해전 이후 5개월간 장군은 해상전투를 하지 않았다. 유능한 지휘관은 기다리는 동안 전략을 짠다고 하던가? 휴전상태에 있는 동안 장군은 새로 선박을 건조하고,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등 전력을 다했다. 또한 결원 인원 보충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다음 싸움을 위한 일대 점검 차원이었다.

 

그 무렵인 1593122일과 25, 선조는 두 차례에 걸쳐 장군에게 유서(諭書)를 내렸다.

 

명나라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 황해도, 서울을 수복하려고 진군을 하면 왜군이 도망 갈테니 수군을 지휘하여 왜군의 귀로를 차단하고 전멸하라.

 

유서를 받은 장군은 모든 전선을 동원하여 본영 앞바다에 집결하도록 하고, 전라우도와 경상우도 수사에게도 합동으로 출전하도록 지침을 통보한다. 5차 출전일을 22일로 정했으나 연일 계속되는 세찬 겨울 비바람에 해상조건이 호전된 6일에야 출전할 수 있었다. 6일 항해를 시작하여 106시쯤 온천량을 출항하여 바로 웅포로 향했다. 당시 웅포는 부산포 해전 이후 적들이 다시 집결하여 교두보로 삼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적들은 웅포를 중심으로 안골포, 제포, 장문포, 영등포, 천성, 가덕 등지에다 성을 쌓고 군사기지화하고 있었다. 장기전을 꾀한 것이다. 당시 적들은 전선 115척에 수군 1만여 명의 대군으로 수륙병진을 위한 거점을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한곳이 공격당하면 상호 지원과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연계성을 염두에 두어 군사기지화 하는 치밀한 전략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군은 적을 바다로 유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산기슭 진지에서 응사하며 포구로 나오지 않는 적과 맞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웅포해전은 8대 해전 중 최장기전으로 무려 1개월여나 이어졌다. 이 시기 장군은 최초로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해 웅포의 적을 세 방향에서 포위 공격한다. 당시 조명연합군이 배후에서 포위 공격했다면 적은 완전 박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육지에서 들어와야 할 명군(明軍)이 지원도 없고, 2개월여 해상작전으로 물자도 부족해 장군은삼도 합동 함대를 해체하고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했다.

 

이 시기에는 조선수군 내부의 곪은 문제가 적잖게 표출되는데, 원균과의 불화가 작전 수행에 큰 악영향을 끼친 점이다. 발포 2호선과 가리포 2호선이 명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돌입했다가 습격을 받은 것과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경상도의 좌위장과 우부장이 못 본 체 하며 구해내지 않은 것은 모두 원균 때문이었다고 장군은 적고 있다. 웅포해전에서 이순신과 원균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틀어지고 만다

 

조직 내 일사불란한 명령 체계와 상호 합동작전의 의미를 퇴색케 한 웅포 작전은 당파라는 조직 이기주의가 조선수군 내부에 깊숙이 침투한 것을 뜻한다. 그만큼 내부의 통일되지 않는 작전은 힘들고 위험스럽기조차 했다. 장군은 작은 이해에 집착하는 원균의 태도에 참담함을 느꼈을 법하다.

 

기업 내부의 협력체계는 조직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데 윤활유가 된다. 기업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구성원들 간에 상호협력하지 않을 때에는 성과 향상은 고사하고, 기업이 존속하기도 어렵다. 구성원들 상호간에 일하고 싶어 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기업이 목표를 달성하는데 전제조건이다. 구성원들 간에 개인적 차이나 동기를 초월해 하나가 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기업성과는 향상된다. 경영학에서 협력을 일컬어 기업성공의 필수요소이자, 기본 개념으로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기업에서는 조직간 협력이 62퍼센트, 개인 간 협력이 21퍼센트, 집단 간 협력이 17퍼센트 순으로 관심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문간·부서간·팀간 기능별(cross-functional) 협력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단과 조직 차원의 협력도 실은 도움을 주고받는 행위의 주체가 개인이기에 개인차원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 나이, 인종, 직급을 떠나 상호신뢰하고 협동하는 조직은 동질성과 다양성 및 책임감 면에서 훨씬 높은 점수를 보인다. 이순신과 원균은 개인 간 협력은 물론이고 집단 간 협력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만일 두 사람 사이에 협력이 보다 원활했더라면 전란은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자만과 오만에 빠져 협력보다는 자신의 명망과 나이만 내세운 면이 크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고 자신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며 조선수군을 궤멸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단연코 상호협력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기주의가 조직을 좀 먹었던 것이다. 우리 조직에 이런 소아병적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지 않은지 돌아 볼 일이다

 

원균과의 불화로 웅포해전은 큰 문제를 야기하지만, 강화협상에는 적잖은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즉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입국을 멈추게 하고 왜군의 서울 철수를 불가피하게 만드는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2차 당항포 해전 등: 승리를 위한 조직력을 확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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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당항포 해전 등: 승리를 위한 조직력을 확보하라

 

 

  

삼도수군통제사 사부유서. 1593815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이로써 임란 승리를 위한 일체화된 명령 체계를 갖추게 된다.

      

1593815, 이순신은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겸 전라좌수사에 임명된다.선조가 통제사라는 직제를 만든 것은 임란 발발 후 16차례에 걸쳐 해전을 치렀으나, 단일하고 통일된 지휘권이 부재해 생기는 극심한 혼란을 막아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경상·전라, ·우 등으로 전투력이 분산되어 효율적인 작전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작전에 임한 수사라 할지라도 다른 도의 군관에 대해 명령할 수 없어서 지휘 체계가 확립되지도 않았다. 이순신은 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삼도수군 통제영의 설치를 건의한다. 이는 전쟁 승리라는 단일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현장을 조사 하고,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한 방책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 기업용어로 말하자면, 업무개선과 조직혁신을 강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장군이 끊임없이 조직혁신을 통해 적에 맞설 내부조건을 만드는데 특별히 관심이 있었음을 뜻한다. 1593년 초부터 1594년 봄까지 장군은 수군 강화를 위한 제반 조치들을 취한다. 군사 병졸의 생활, 휴가, 규율, 상벌, 함선건조수리, 군량확보, 군사자재 확보 등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졌다

 

159434일 경남 진해 당항포 해전(2)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임금이 내린 유서에 따라 이루어진 첫 작전이었다. 임금은 유서에서 경은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격멸하라고 명했다. 유서를 받은 이순신은 이억기 등에게 출전 명령을 내리고, 순변사 이빈에게 약속대로 군사를 거느리고 육지에서 적을 치라는 공문을 발송한다.

 

이 작전이 종료되는 시점에 이순신은 오랜 전란의 피로감과 사천전투의 후유증과 토사곽란 등이 겹쳐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아팠다. 이 때문에 직접 진두지휘하지 않고 어영담을 중심으로 적절한 전투 편성과 경쾌선을 이용한 기동 및 기습공격작전을 계획하여 작전을 수행했다.

 

그 해 929일부터 108일 사이에는 장문포 해전이 있었다. 이 해전은 도원수 권율 휘하의 곽재우, 김덕령이 참전한 수륙협공작전으로 수행되었다. 적이 장문포 일대를 중심으로 각 포구마다 집을 짓는 등 장기간 머물 채비를 갖추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과 여러 차례에 걸쳐 출전대책을 상의하고 직접 만나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각 도 지휘관들의 표식을 위한 호의(號衣)까지 지급하며 수행한 수륙협공책이었다.

 

수륙이 서로 호응하여 작전을 수행하려 했으나, 적들이 패를 꽂아 둔 채 도주하여 계획대로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그 패에는 일본은 지금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하는 중이니 서로 싸울 수 없다고 쓰여 있었다. 강화협상을 하며 시간을 벌려는 간교한 술수였다. 성과는 미약했지만 관군, 의병과 공동전선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해전은 큰 의의가 있다.

 

장군은 당항포에서 적선 21척을 불태웠다는 보고를 받고 역풍을 헤쳐 거제 흉도에 이르렀을 때 현감 기효근이 전달한 명나라 군사 2명이 왜적 8명과 함께 보낸 급보를 받게 된다. 적과 화의 교섭 차 웅천에 머물고 있는 명의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이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적의 토멸을 금하라는 해전 금지령을 담은 금토패문(禁討牌文)이었다. 이순신은 격노했다. 담종인이 이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던 배경은 선조가 전시작전지휘권을 명에 넘겨준 상태에서 우리를 배제한 가운데 명과 왜 간에 더럽고 은밀한 강화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은 명나라 군사를 즉시 불러 패문을 보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명군의 대답은 작년 11월 도사 담종인 등이 웅천에 도착하여 지금까지 머무르면서 화의를 허락하는 명령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왜군의 여러 장수들이 마음을 돌려 귀화하지 않는 자가 없고 모두들 무기를 집어넣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며 그들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희들 모든 병선들도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왜의 진영에 가까이 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장군은 병중에도 글을 짓고 정사립에게 대서토록 하여 즉시 담종인에게 보냈다. 장군은 다음과 같이 답서를 썼다.

 

왜인들이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 바, 거기가 모두다 우리 땅이거늘, 우리더러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라 하니, 제 고장이란 어디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고, 또 트집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니요, 왜적들입니다. 왜인들이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적들이 아직도 그 포악스런 행동을 그치지 아니하고 바닷가에 진을 친 채 해가 지나도 물러가지 아니하고 여러 곳을 쳐들어 와 살인하고 약탈하기를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 하온데, 병기를 거두어 바다를 건너 돌아가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오리까? 이제 강화한다는 것은 실로 속임과 거짓밖에는 아니옵니다.

 

치밀하고 논리 정연한 답서로 장군은 금토패문의 부당함에 대해 당당히 항의했다. 국왕인 선조조차 명나라 장수가 서울에 오면 몸소 찾아가 천장(天將)이라 칭하며 굴신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이순신이 취한 태도는 과연 조선의 장군다운 태도였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목숨을 건 이순신 협업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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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이순신 협업 공동체

 

임란 7년을 돌아보며 경영에서 임무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임무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 그에 따른 상황 대처법과 가변적 상황에 대한 능동적 적응력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전투태세다. 해야 할 일이 정해지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목표를 위해 준비하고 실행하는 마음가짐과 행동력은 임무에 임하는 자세다. 장군은 전쟁 승리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부하와 장수들에게 임무를 명확히 제시했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페르시아 100만 대군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을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킴으로써 나라를 구해내는 영웅담을 그린 영화 300이 있다. 100만 대군과 맞선 무모한 싸움이었지만, 스파르타의 위대한 용사들은 나라를 위해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한 이 전투에 맹렬히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임란 당시 전라좌수영에 소속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군과 함께 한 277명의 막하의 장수들도 이들과 같다.

 

이순신을 따른 막하의 장수들을 보면, 대략 277명의 이름이 올라있다. 대체로 임진년과 전쟁이 소강상태에 보인 후 다시 재발하는 정유년에 이순신 군영에 뛰어든 핵심인물들이다. 이들은 장군과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사를 함께 했다. 277명의 핵심인물들과 더불어 장군은 7년 전쟁을 한 몸으로 치러 낸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순신의 인품과 리더십에 흠모돼 구국의 일념으로 합류했다. 장군은 그들을 거두었고, 심지어는 발탁하여, 전투 역량을 배가하고 작전을 숙의했다. 나대용은 수군 장정과 군량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직접 장군을 찾아와 거북선을 건조하였고, 김세호는 전선 건조 감독이 되어 직접 연장을 들고 8척의 대형전선을 제작했다. 정운은 수군 정비를 위해 합류했다. 이몽구는 의병을 모아 이순신에 합류했다. 박광춘은 장군에게 맹서하는 시 한 장을 써 바치며 구국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장군이 순국하자 끝까지 맞서 싸워 적의 칼날에 생사를 같이 한 인물이다. 김유흠, 정응 등도 자발적으로 이순신 대열에 뛰어 들었다. 그 외에도 현직자를 비롯, 전직자들까지 스스로 내려와 장군을 도와 전쟁 승리를 이루어냈다.

 

장군은 속속 합류해 오는 인재들을 각기 재능에 따라 발탁했다. 김몽룡은 군사사무를 주관하였고, 오진민은 물길과 기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제공했으며, 이방직은 화약을 제조하는데 능했다. 탁련은 봉화를 들어 한산 밤바다를 밤낮으로 지켰고, 낮이면 앞 바다에 배를 늘여 뜨려 형세를 위험 있게 보이게 했다. 앞섬에 돛을 만들어 세워 적들로 하여금 전선(戰船)으로 오인하게끔 유도하기도 했다. 이봉수는 임란 직전 화약을 제조했고, 좌수영과 돌산도 사이에 수중 철쇄를 설치하고, 봉화대를 쌓는 등 활동을 하였다. 순천감목관 조정(趙玎)은 스스로 전선을 마련하고, 집안의 종들과 목동을 인솔해 부산포 해전의 지원군으로 나섰다.

 

 광양 현감 어영담은 세 차례 해전에서 적의 대··소 함선을 8척이나 격침시켰다. 그는 영호남의 수로의 특성과 해상 요충지를 자세히 알고 있던 장수였다. 김완의 경우에는 적과 맞서 싸울 때 먼저 북을 치고 용기를 북돋웠으며, 생선과 소금을 흥정하여 잘 팔고 양곡과 미숫가루를 잘 비축해 군사들을 배고프지 않게 한 한산 수국(水國)의 진정한 재무전문가였다. 김창한은 장군에게 여러 전략을 제안했고, 박평동도 전쟁계획에 출중한 의견을 개진하여 장군도 그를 아꼈다. 이선온은 장군이 운주당에 있을 때 밤이 깊어지면 그를 방 안으로 불러들여 군사에 관한 것을 논의한 전략가였다. 고금도에 있을 때에는 명나라 장수 진린조차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순신의 부하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거니와, 그 중에서도 이선온과 같은 사람은 쉽게 얻지 못할 인물이다.

 

그는 장군이 가장 신임한 막하로 전략을 논의하고, 둔전, 해로통행령을 발행해 군량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란은 한편으로는 경제전쟁이었기에 자원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유형도 이순신의 참모로 칠천량 해전에서 패해 전선이 10여 척도 안 된 상태에서 병력 모집을 위해 피난민 가족을 보호해 주고 장정을 모으는 계책을 마련해 군비와 민심 안정을 도왔다. 임연준은 명량해전 이전부터 여러 차례 적 정황 등 주요 정보를 제공하였다. 변홍주는 명량해전이 일어나자 자신의 형제들과 의사(義士) 300여명과 함께 배를 가지고 참전해 장군의 작전을 후원하는 계책을 세워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장군이 서울로 압송돼 투옥되었을 때 변홍주와 변연수는 구원을 요청하고, 장군의 군사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진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택남은 장군이 투옥되자 식음을 전폐하였고, 변홍원은 날마다 바다에 나가 장군이 석방되기를 기다렸다. 송희립, 정경달, 황대중은 대궐문 앞에서 울부짖으며 장군의 무죄를 하소연하였다.

 

이순신 일가의 편의를 봐 준 창원 정씨 문중도 그 중 하나다. 장군은 둘째 형 요신(堯臣)이 사망한 1580년과 맏형 희신(羲臣)이 사망한 1587년 이후 모친과 맏형 및 둘째 형의 자녀들까지 모두 부양했다. 158912월 이순신은 정읍현감으로 부임해 갈 때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간다. 임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순천부 여수 고음천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이때 창원 정씨 집안의 정철(丁哲, 1554~?)이 방 한 칸을 비우고 지내게 해 준다. 정철은 이후 집안의 재산을 풀어 의병을 규합한 뒤 장군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전하고 전투에 합류했다. 그의 동생 정린도 마찬가지로 해상의병 활동을 했다.

 

특히 녹도만호 정운은 선봉장으로 적을 무찔렀고, 부산포 해전에서 적의 탄환을 맞고 순국했다. 그가 죽자 장군은 국가가 오른 팔을 잃었다고 할 정도로 슬퍼했다. 장군은 부산포 해전의 공을 오로지 정운의 힘이었다고 돌렸다. 1592911일에 쓴 제문에서 장군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거니와, 나라를 위하여 던진 그 몸 죽어서는 오히려 살았도다.

 

정운에 대해 쓴 이 글은 마치 장군 자신의 노량해전에서의 죽음을 예언한 듯하다. 이순신은 저 노량 앞바다에서 더럽고 추악한 전쟁의 종결자로서 죽음으로써 살아났고, 역사에 길이 그 굳은 뜻과 이름을 새겼다. 목숨을 버렸기에 산 것이다. 그런 자신의 심지를 정운의 죽음 앞에서 드러낸 것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자발적이며 자기주도적인 임무수행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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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이며 자기주도적인 임무수행 조직

 

이순신과 함께 한 사람들은 임무 수행을 위한 혼연일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발적으로 이순신을 찾아왔고 따랐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전쟁 기간 동안 이순신이 직접 진두지휘하는 본영 군사의 수가 많기도 했지만 사망자 수가 가장 많았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적과 맞서 싸웠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사망자의 절대 다수가 천민층이었다는 점이다. 포작(鮑作), 토병(土兵), 사노(寺奴)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전라좌수군의 하부구조를 이루며, 수전 승리의 밑바탕을 이루었다.

 

 이들은 평소 생업대로 바다와 선박에 익숙한 업종에 종사한 사람들이었다.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거나, 군적에 올라 전투에 참전한 용사들이었다. 이들은 해상의병으로서 이순신과 함께 했다. 해상 전선을 운영하는데 선박을 다루는 기술이나, 바다에 익숙한 이들의 특장점은 이순신 함대의 기본 전력을 이루었다. 특히 사망자 중에 배의 노를 젓는 격군(格軍)의 수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은 근접전시 적의 조총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장수와 군사들만이 치른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치른 것이다. 그들은 이름을 지우고 나라를 위해 꽃 같은 목숨을 바쳤다.

 

의병 지도층들의 경우에는 거의가 전라도 연해지역에 거주하는 무과출신을 포함한 사족이나 승려계층이었다. 이들은 이순신과 같이 행동하기도 하고, 해안지대에서 독자적으로 게릴라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들 토병은 평상시 수영 가까운 곳에 거주했던 토착민으로 비정규군이자 특수군으로써 이순신 부대를 도왔다. 그들의 이름을 지우고서 임란 승리를 평가할 수는 없다. 누가 이토록 목숨을 걸고 적에게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소중한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았을까? 이순신 때문이다. 마음으로부터 부하와 백성들의 충성을 이끌어 낸 이순신과 더불어 일심동체의 협력체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뢰라는 자산이 없으면 결코 얻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통영 남망산 전망대에서 바라 본 해상 전경. 해상 크레인이 우뚝 솟은 통영 앞바다다. 크고 작은 배들이 항구에 드나드는 것을 보며 불현듯 협력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협력사간, 기업간, 조직간, 팀간, 강력한 상호협력체계는 21세기 경제전쟁 승리의 대원칙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끈 400여 년 전 조선수군도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리라.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혁신주도형 동반성장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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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주도형 동반성장 모델

오늘날 기업 조직내부는 상사와 직원 간 서열 관계보다 강한 협력체계를 우선시 한다. 구성원들이 일을 수행하는 특성은 협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업무 특성상 과업복잡성이 크고, 과업·목표·결과 등이 상호의존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과업성과도 협력과 정(+) 관계에 있다.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도 마찬가지다. 2000년 국가별 지식축적량을 보면 우리나라는 미국대비 17, 일본에 비해 4.4배나 작은 것으로 나타난다. 제조업 및 서비스업 매출액에서 혁신제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각각 18, 29퍼센트로 OECD 각 국의 50퍼센트 대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가기술위원회가 밝힌 바에 따르면, 선진국 대비 신성장동력산업의 기술수준을 보면 디지털 TV, 디스플레이어, 로봇, 미래형 자동차 등에서 3~5년이나 기술이 뒤떨어져 있다. 평균기술수준도 69.8퍼센트, 평균기술격차도 4.2년이나 뒤진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왔을까? 이는 신기술의 흡입성 정도, 산학협동 정도, 기업 간 협동 정도 면에서 우리가 경쟁국에 비해 낮기 때문이다. 그만큼 혁신을 통한 생산성 기반이 불충분하다는 방증이다.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경쟁 하에 본업을 강화할 것인지, 신사업에 뛰어들 것인지 중대 기로에 놓여 있다. 기업은 창업, 성장, 성숙을 거치 성장통을 겪게 되는데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재도약을 하게 될지 쇠락을 맞이할지 결정된다. 물론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떤 협력체계를 구축해 놓느냐 하는 것이다.

 

마르코 이안시티(Marco Iansiti) 하버드대 교수는 대기업 및 중소기업간 상생협력은 점차 글로벌 경제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기업은 자사가 속한 생태계를 발전시키고 성과를 관리하며 역량을 통합하는 능력을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흐름의 배경에는 과거의 모방형, 각개약진형, 강소·중소기업과의 미약한 연관관계가 지속적인 혁신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기초한다. 결과적으로 경쟁력을 획득하기 어려운 구조였다는 얘기다. 지금 한국경제는 성숙단계에 진입해 있는 까닭에 노동과 자본 위주의 양적 성장전략은 더 이상 주효하지 않다. 지식기반 경제하에서는 과거처럼 외연적 확대만으로는 성장동력을 창출할 수 없다. 이전의 대기업 중심 성장전략은 산업 제 부문 간 연관관계성이 미약하고, 수요기반이 부재하면서 선순환 구조가 단절되어 경쟁력 저하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사회적으로 경제의 양극화를 가져오고, 산업구조가 왜곡되는 등 문제점이 있다. 대기업-중소기업은 이제 기술협력 관계를 통해 외부와 상호보완적 자원들(complementary external resources)을 공유해 활용함으로써 기업들의 자원기반을 넓혀 주고, 혁신성과를 향상시켜 주어야 한다. 상호보완적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 협력에서 동반성장으로 사고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한다. 대기업-중소기업간에 창조적 관계성이 전제될 때 산업생태계 차원의 경쟁력이 확보된다. 강소·중소기업의 백업어(back upper) 기능이 약화되면, 대기업 또한 성공의 실패나 핵심경쟁력이 변화한 환경 대응력에 실패해 핵심경직성(core rigidity)으로 급전직하 될 가능성이 높다. 독일경제의 경쟁력의 근거는 강력한 기술집약적 중소기업의 품질 경쟁력이 산업우위를 점하게 하기 때문이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아이켄베리(G. John Ikenberry)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 기업들은 지적자산 시대로 넘어가며 중대한 전환점(critical junctures)’에 놓여 있다. 강력한 상생협력의 방법론으로 혁신주도형 동반성장 모델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순신과 그의 막하 사람들, 그리고 남해 연안 백성들의 협업체계에서 우리는 한국경제의 또 다른 혁신 모델을 찾게 된다

 

장군은 운주당, 즉 지금의 제승당에서 수군 장졸들의 의견까지 경청하며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냈다. 즉 활달한 소통은 놀라운 전략을 이끌어 냈고, 나아가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결전 의지를 불태우게 했다. 이 점은 임란승리의 원천 역량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장군이 서울로 압송되고 나서 원균이 부임했을 때에는 제승당 내 울타리를 치고 기생들을 들여 조선수군 사이에서는 "조선 수군을 끝났다!"는 자포자기의 심적 상태가 되고, 그로 인해 탈영병이 속출하였다. 이 둘간의 차이점은 오늘날 리더들에게 웅변하는 바가 크다.

 

장군은 세 번씩이나 현직에서 쫓겨났고, 두 번에 걸쳐 백의종군 했다. 권력과 거리가 먼 변방의 장군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소위 조직 내 찬 밥신세였다. 그런데도 장군의 어떤 점이 이들로 하여금 목숨을 내걸고 따르도록 했을까? 적당히 요령을 피우고, 숨어 있기만 해도 생명부지는 할 텐데 이런 자발적인 참여를 한 원천은 무엇인가? 장군이 먼저 희생함으로써 부하들에게 강한 신뢰감과 결속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신분을 뛰어 넘는 구국의 의기투합이었다. 요즘 경영용어로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리더십이란 위에서 명령하고 아래에서는 수행만 하는 게 아니다. 여기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강한 결속력과 유대감이 내재되어 있고, 조직이 한 방향을 향해 바위도 뚫고 태산도 무너뜨리며 나가는 강한 동료애가 밑바탕 되어야 한다. 이순신 대오는 철저하게 협업체계를 유지했다. 단합된 조직력이 임란의 승부를 갈랐던 것이다. 과연 우리 조직은 어떤가.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645년 전 전래된 문익점의 목화씨는 어떻게 일본에 건너가 토요타자동차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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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씨드

The Seed

645년 전 전래된 문익점의 목화씨는 어떻게 일본에 건너가 토요타자동차가 되었는가?

 

 

나는 지난 2008년 일본 나고야의 토요타산업기념관 앞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지만, 내가 찾은 이유는 간명하다.

 

문익점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대부분 한국인들은 렉서스가 길에 굴러다는 것은 보아도, 일본 토요타가 만들어진 배경에 문익점과 목화씨, 문익점 당시 만든 직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이 최초로 밝힌 바다.)

 

한국과 일본, 문익점과 토요타야말로 한일간 산업의 격차, 국운의 차이를 결정하는 주요 바로미터가 된다.

 

그점을 그 무렵 7년간의 연구 작업을 통해 <더씨드>라는 제목의 책으로 냈었는데, 그 서문은 내가 왜 그 책을 쓰게 되었으며, 문익점-토요타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지 잘 보여준다고하겠다. 해서 여기에 실어본다.

 

 

토요타에서 문익점을 생각하다

    

영원히 지지 않는 도전이 있다. 처음에는 작은 도전이었으나, 추구하는 바의 원대함으로 훗날 큰 족적을 이루는 것이 있다.

처음의 흥분감과 신선함은 차차 대중에 보급되어 일반화되고 나면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혁신이든 초기에는 대단히 어렵다. 이 점을 알게 되면 혁신자들의 숨은 공로에 깊은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어떤 기술혁신이나 산업혁신도 밟아온 길이 이와 같다.

 

우리나라 주요 수출 효자품은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조선, 철강 등이다. 기술 개발과 도입 초기에는 대단히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한 나라를 먹여 살리는 핵심 산업이 되었다. 물론 그 수혜자는 대다수 고객들, 국민들이다. 나아가 글로벌 시대, 해외시장의 고객들도 주요 수혜자가 된다.

 

중요한 점은 어떤 기술이나 산업도 도입성장기를 거친 후 적절한 시점에 혁신을 이뤄내지 못하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백여 년 전,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가 그렇다. 도입과 더불어 최초의 혁신이 이루어진 다음, 지속혁신을 이뤄내지 못했을 때의 처참한 결과를 잘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문익점과 그가 가져온 씨앗(Seed)에 주목하고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화 도입을 기점으로 이후6백여 년의 시간을 꿰면,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해야 생존하고 번영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신의 결과는 또 다른 혁신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역사는 경영의 산 교육장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역사와 경영이 맞물리는 접점이다. 이것은 또미래 경영을 위한 열쇠가 된다.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는 하나의 단순한 농작물의 씨앗이 아닌, 모든 산업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혁신과 창조의 원천 씨앗(Innovative and Creative the Original Seed)’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한 알의 씨앗에서부터 기업의 과제이자 국가담론인 생존과 번영을 위한 혁신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생존조건은 여기서부터 마련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익점의 목화씨에는 수많은 피땀이 어려 있고, 혁신의 몸부림이 배어 있다. 또한 사명감과 애정이 녹아 있다.

나라 사행(使行) 길에 눈여겨보고, 비밀리에 들여온 목화씨는 문익점과그의 장인인정천익 일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결과를 빚어낸다. 하나의 작은 의지가 의료(衣料)혁명을 일으킨 폭발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목화씨는 원나라 해외유출 금지품목으로 알려져 있다지금 말로 하면 원천 기술, 시료, 소스(source)와 같은 것이다. 문익점은 바로 이 원천 씨앗을 가져옴으로써 우리의 의료생활은 물론 일본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가 가져온 목화씨는 단 10! 그 중 한 알만이 구사일생으로 꽃을 피운다. 한 대의 목화 줄기에서 첫해 100알의 씨가 맺히고, 3년에걸친 집중 재배와 종자 채집의 결과10년 내 한반도 전역에 보급되기에 이른다. 배양과 재배에 성공하여 보급확대가 임계치에 도달한 것이다.

 

그로부터 대략 25년 후인 1392년 조선왕조가 들어서며 목면은 본격적인 재배에 들어가고, 46진의 개척 시 북점화(北點化) 정책에 힘입어 북방 지역의 경제활동과 국토 확장에 크게 이바지한다. ()생활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신성장 엔진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매우 지난하고, 고된 작업이었다. 초창기에는 우리나라 기후 여건상 서리가 내리지 않는 무상일(無霜日)이 짧고 장마가 길어 재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민관 협동으로 이루어진 보급 확대로 이전에는 감히 상상치도 못한 혁신을 이뤄냈다. 씨앗보급만의미 있지 않다. 목화송이에서 씨를 빼내고 이를 다시 자아내는 직기인 씨아, ,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가 고안제작됨으로써 섬유혁명은 폭발적으로 확산된다. 이때의 의료혁명을 훗날의 산업혁명에 견주어보아도 결코 손색없다. 오히려 더 원천에 가깝다.

 

지금이야 의료생활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지만, 불과 1백 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무명옷을 손수만들어 입. 무명은 백성들의 옷과 이불이 되었고, 목화씨로 짠 기름은 면실유가 되었다. 또한 목화줄기는 사랑방 문화를 만들어내 우리만의 훈훈한 문화콘텐츠를 형성해왔다. 나아가 목화는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으로 불리게 했다. 문화적 상징 심벌이 되었으며 민족공동체를 이룬 산물이 되었다.

 

목화 전래 후 목화씨와 방직기술은 다시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의료생활은 물론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목면이 전래되기 전, 일본의 서민들은 추위에 처참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목화 도입 후 의생활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자, 생활경제에 안정을 꾀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임진왜란 때에는 화승총의 심지나 선박의 돛 등으로 쓰이며 오히려 조선 침략의 도구로 사용된다. 그뿐만이 아니. 날 개항을 전후로 한 시기에 급속도로 발전한 일본의 방직기술은오히려 조선 면업을 초토화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조선은 원료 공급기지와 소비지로 전락,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병참기지화되고 만다. 두 나라의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

 

일본에 목화가 전래되고, 그 후 일련의 변천사에서 등장하는 기업이 토요타자동차의 전신인 토요타자동직기주식회사이다.

 

이 회사의 창업자인 토요다 사키치(豊田佐吉)는 실로 탁월한 엔지니어였다. 그는 평생 직기 개발에 힘써 인력직기를 동력직기로, 동력직기를 다시 자동직기로 발전시, 또 평면직기에서 환상(環狀)직기를 개발해내며 자동직기 혁신에 평생을 바친다. 혁신적인 발전을 이뤄낸 토요타는 마침내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기에 토요타자동차를 출범시킨다.

 

토요타생산방식(TPS, Toyota Production System)으로 잘 알려진 1백 년간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혁신적 노력은 토요타이즘(Toyota-ism)이란 말을 만들어내며, 전 세계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다. 현재 토요타는 매출 180조 원에, 10조 원 이상의 이익을 내며 지속성장 가능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익점 자신이 직접 전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 목면이 조선으로부터 전래된 것은 부정키 어렵다. 우리는 선도자 역할을 했으나, 그 덕을 톡톡히 본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조선 목면을 받아들여 지속적으로 혁신시킨 반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도입초기발전을 근대에까지 이어나가지 못. 결국 가내수공업에 머문 조선 면업은 끝내 일본 면방직업의 식민지가 되고 만. 일본은 조선의 목화를 받아들이고, 종자개량을 통해 선험자의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는 성과를 낸다. 이 과정에서 혁신의 릴레이 현상이 벌어지, 산업 전환이 이뤄지, 토요타는 자동차산업으로 환골탈태했던 것이다.

 

일본 나고야에 위치한 토요타산업기술기념관에는 방적기 등 일본 기계공업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토요타자동차의 발전 과정도 한눈에 볼 수 있다.

 

토요타이즘이 확산되면서 한국에서도 많은 기업인들이 이곳을 견학해왔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이나 효율성 차원의 벤치마킹을 넘어, 오늘날 한국인들은 목화씨 한 알을 놓고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토요타 1백 년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이처럼 크다.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지속혁신의 노력 없이는 곧 뒤처지고, 잊히고 만다. 또한 개인이나 기업, 국가 차원의 혁신적 노력 없이 발전을 기대할 수도 없다. 문익점 시대의 탁월한 성과는 21세기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문익점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혁신과 도전은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

 

이상은  <더 씨드 > 서문이며, 아래 지도와 도표 설명, 동영상은 <더 씨드>의 지난한 여정과 더불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 잘 보여 준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일본에 목화가 전파된 것은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을 통해서도 전파되었으나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이때의 목화종자는 전부 절멸하고 조선에서 들어온 것이 배양에 성공돼 확산되었다. 이때 목화종자만 들어간게 아니라 문익점의 모든 직기 기술도 함께 들어가 일본 목면산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한 커뮤니티 회원들은 해마다 경남 산청 소재 문익점 목화시배지를 찾아 기념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왜 이곳을 찾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이것이 도요타 자동차의 전신인 토요타자동직기주식회사의 출범의 시발이 되는 것이다.

 

지도를 보면, 전세계 목화 원생종은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시작됐듯 아프리카를 기원으로 하며 전파었는데, 우리는 인도->중국->고려로 이어지는 전파 루트를 통해 받아들였다. 고려에 온 것이 바로 조선에 이르러 일본으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도표는 연전에 다큐멘터리 <코튼 로드 Cotton Road>를 제작하기 위해 작업한 것으로 전세계 코튼로드와 관련된 원천 콘텐츠의 일부이다.(목화와 연결시킬 수 있는 키워드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인류의 문명, 예수의 의상 섬유 조각 일부 성분, 미국 남북전쟁, 청바지, 노예해방운동, 브루스 음악 장르, 현재의 FTA, 전세계 주요 패션쇼... 등 무수히 많다.) 앞의 지도는  해당 다큐의 국내 부분인 <문익점 혁신 Road>를 추적하는 루트가 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이것이 한일간 650년 목화와 관련된 전체 History map이다. 1364년 목화씨 도입부터 2009년까지 실로 긴 시간에 대해서 사전 리서치를 하였었고, 목화와 관련된 역사를 경영과 엮어 씨줄 날줄로 꿰어 나갔었다. 이런 걸 가리켜 인문의 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래가 최근에 만든 한 e-러닝 홍보 동영상이다. 잠시보면, 왜 문익점과 혁신정신이 오늘날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모르고서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 경영은 보다 차원 높은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전략적 판단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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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판단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성공하는 기업들, 초우량 기업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장에서 벌어지는 매 경쟁국면마다 승리를 이뤄낼 조건을 찾고, 이를 실현해 낸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다 큰 승리는 단순히 영업력 강화를 통한 일시적 시장점유율이나 매출 상승만을 뜻하지 않는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경쟁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남다른 전략적 우위를 갖는 것을 뜻한다. 이 점에서 개별 전투의 승리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장군의 핵심경쟁력 중 하나는 전략우위에 있고, 이는 전략실행의 기초를 이룬다. 예컨대, 조선 정부는 수시로 전략적 판단 착오를 일으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개월 전,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해야 한다는 논란이 인다. 육군 장군 신립(申砬)이 주장한 방왜육전론이 그것이다.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지상군 위주로만 전략을 짜겠다는 것이었다. 바다에서 물밀듯 몰려오는 적을 육지에 끌어들여 화를 자초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장군은 곧 수군 폐지의 부당성과 수군의 효용성을 알리는 주장을 알리며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는 데는 수군이 아니고 누가 한단 말입니까? 수전, 육전의 어느 한 쪽인들 없앨 수 없습니다.

 

육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제해권(制海權)을 상실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해양지배적 판단을 한 장군은 싸움의 거점을 적이 닿기 전, 적이 다가오는 바다 한가운데로 정한다. 그럼으로써 전란의 피해를 줄임과 동시에 근 100여간 일본 전국시대를 통해 육지전, 백병전에 능한 왜군의 경쟁력을 무력화시키고자 했다. 판을 바꾸어 놓고 적을 상대한 것이다. 장군이 평소 해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해전 경쟁력을 통해 육전 승리의 조건을 만들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장군은 해양 경영전략을 이렇게 간파했다.

 

왜놈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해군인데, 해군으로서 싸움에 나서는 자가 하나도 없고 감사(監司)에게 공문을 보내어도 감독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군량조차 의뢰할 길이 없어, 온갖 생각을 해 봐도 조처할 도리가 없으니, 해군의 일은 부득이 폐하게끔 되었습니다. 순신(舜臣)저 같은 한 몸이야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지만은, 나라 일을 어찌하오리까.

 

그런데도 조정은 조선수군이 약하니 폐하라고 명했다. 조정의 이 같은 전략부재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다시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고 나서도 반복된다. 이때 조정에서는 우리 수군이 무척 약하여 적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 하여 장군으로 하여금 육지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전략개념으로 보았을 때, 조선수군이 없다면 적군의 기동력은 돛에 바람을 안은 듯할 테고, 서해를 끼고 북상하면 서울이 순식간에 유린되는 상황은 피할 길이 없다. 명량해전에 앞서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중에 나오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令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라는 저 유명한 결의는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다. 새로 판을 짜고 전열을 가다듬어 적과 맞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임진년 이후로 적이 감히 충청, 전라 등 남방을 겁탈하지 못한 것은 실상 우리 수군이 그 세력을 막았기 때문인데, 이제 만일 수군을 폐하면 적이 반드시 호남을 거쳐 한강으로 올라 갈 것이요, 다만 순풍에 돛을 한 번 달면 될 것이니, 그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는 서울로 올라간다. 장군이 이때 피력한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수군의 존재, 즉 존속가치에 대한 것이다. 그 다음은 수군효용론이다. 임란 전 조정이 방왜육전론을 주장한 것은 전략적 착오더라도, 미약한 군세로 적을 대적하기 위해 나름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취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수군·육군 어디도 폐할 수 없다는 장군의 주장이다. 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으며 우리는 너무 흔하게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을 써왔다. 서구 경영 컨설팅 회사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무책임한 수사(修辭)가 경영의 만병통치약인양 받아 들여져 왔다. 선택을 통해 기업의 군살을 빼고 선택된 자원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미명 하에 국내 유수 기업들은 외국 자본에 헐값에 팔려 나갔고, 기업들은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지난 15여 년간 대한민국 경영계를 지배한 이념인 구조조정의 광풍이 불었지만, 그간 세계적인 기업과 맞먹는 초우량기업이 대한민국에서 탄생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선택과 집중이 아닌, ‘집중화된 선택을 취해야 한다. 임란이 일어나기 10개월 전인 15917월 조정의 이 같은 군사운용 흐름에 대해 장군은 육전, 해전 다 버릴 수 없지만, 특히 전략상 해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집중화된 선택을 해야 한다고 피 끓는 호소를 한다. 양쪽은 서로 순망치한과 같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전술적인 면에서는 전투력의 각 요소를 적절하게 결합하여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우세한 전력을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수륙 양쪽을 다 살리면서도 기동성과 상호 협동성을 발휘해 대처능력을 높이는 것은 장군의 군사경영의 원칙을 이룬다. 오늘날 복잡계 경영에서 기업들에 필요한 것은 이분법적·분절형 사고가 아니라 통합적 사고여야 한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내버려야 하는 사고보다는 다 같이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경영의 궁극적인 해법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남의 말에 솔깃하다. 글로벌 자본이 노리는 것도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구성원의 능력개발에 총력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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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의 능력개발에 총력을 다하라

 

조직의 80퍼센트는 일을 안 하거나 성과가 떨어지고 나머지 20퍼센트가 전체 일을 한다는 이른바 80/20 법칙이란 게 있다. 일만하는 일개미 중에서도 80퍼센트는 놀고 있다는 얘기를 예로 많이 든다. 기업은 생산성을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 구성원들의 경력개발에 관심을 기울인다. 80/20법칙을 예로 든 것은 장군의 부대원들도 오합지졸로 탈영 등 내부 문제에 크게 봉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10명 중 8~9명은 겁쟁이이고 용감한 자가 1~2명에 불과하다고 장군 스스로 평가할 정도였겠는가?

 

그 안에 용감한 자가 있더라도 홀로 흰 칼날을 무릅쓰고 죽기로 돌격하여 싸울 수 있겠는가?

 

요는 그 1~2명이 나머지 사람들과 섞여서 하향 평준화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전투력이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당시 수군은 천업(賤業)이라고 하여 쓸 만한 자들은 모두 육군으로 뽑혀가는 실정이었다. 이 같은 문제의 해법으로 장군이 제시한 것은 코칭과 멘토링이었다. 장군은 수군 조직력 강화를 위해 전체전력 향상을 목표로 했다.

 

만일 정선한 군졸들을 용감하고 지혜 있는 장수에게 맡겨서 그 소질과 능력에 따라 잘 지도했더라면 오늘의 사변이 반드시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병사들의 경력개발이 전력우위의 첫 걸음이라는 인식이다. 장군은 이처럼 구성원의 능력개발에 관심을 기울인다. 무슨 일이든 지시한 일에 대해 수시로 점검을 실시하여, 직무를 완수한 군사들에 대해서는 시상하여 동기부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여기에는 코칭과 멘토링만 따른 게 아니라, 부하 장수에 대한 위임도 함께 한다. 장군은 일단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고 권한위임적인 태도를 취한다. 예컨대 거북선 건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나대용이나 언제나 매우 헌신적으로 일했던 어영담, 정경달 등의 경우에는 그들이 하는 일을 전적으로 믿었고 간섭하지도 않았다. 또 그들의 의견을 듣고 건의를 모두 수용했다.

 

장군은 죽으면서까지 권한 위임을 통해 승전을 이루어냈다. 마지막 대회전의 불꽃이 일던 순간, 손문욱은 평소 명확하게 장군의 작전계획을 이해해 실천지침에 따라 목숨을 걸고 장군을 대신했다. 이는 위기 시에도 강력한 조직력과 권한위임의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진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쳐부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장군은 21세기 리더상의 모습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직원들의 요구에 민감했고, 가치지향적이었으며, 불확실성과 모호성, 복잡성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변화담당자의 역할과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신중한 위험부담자, 평생학습자, 비전가의 모습을 갖는 변혁적 리더상도 장군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조직 구성원에게 임파워먼트함으로써 전체 전쟁지휘관으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셈이다.

 

변화하는 기업환경에서 경영자는 조직구성원을 지적으로 자극하고, 개별적으로 배려하며, 분발할 수 있도록 비전을 심어 주어야 한다. 또한 직원들을 동기부여시켜 자율적이며, 창의적인 업무성과를 내도록 유도해야 한다. 장군은 스스로 시련이 있었지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례로 군사들에게 일정한 시험을 보여 승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조직원의 사기 앙양 차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무과 과거 시험은 통제사의 권한으로는 행할 수 없었다. 조정에서 공고하는 장소에서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전쟁터에 있는 병사들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군은 수군들이 해상 활동으로 과거를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사기를 앙양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린다. 수군들이 해상에 있어 길이 멀어 시험 기일에 갈 수 없고, 적과 대치중인 상태에서 군사를 뺄 수 없으니 진중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특별히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장군의 건의는 임금과 중신들의 승인을 받아 159446일 한산도에서 과거 시험장을 열게 만든다. 한산도는 섬이어서 말을 달릴 수 없는 까닭에 대신 편전을 쏘게 하는 시험과목을 변경하고 실전에 맞는 테스트를 치르게 한다. 이 점에서 장군이 지닌 사고의 유연성과 혁신적 마인드가 읽혀진다.

 

 

한산정. ‘이순신의 섬한산도에는 불확실성의 경영환경에 직면해 경영목표를 명확히 한 한산정이 바다 를 품고 있다.

 

위대한 리더들은 회사로부터 제공되는 보상이나 우발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간다. 장군이 원했던 것은 개인적 부나 고위 관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단련시키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개인적 영광이 아니라, 자신이 설정해 놓은 기준치를 충족시키기 위한 삶을 살았다. 개인적 행동 규범과 자기 규율에 철저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절대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삶을 살다간 것이다. 장군의 역사적 업적은 이같은 사실을 잘 밑받침 해주고 있다.

 

이런 절대적인 기준은 국가가 부여한 임무와 일치하는 자기 본분을 지키는 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컨대 장군이 거느린 대부분의 전력은 정부의 지원 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국가를 방어하는데 수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비전을 스스로 구현한 것이다.

 

장군은 자신의 절대적 가치를 지키는 데에는 단호했을지라도 상대의 입장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 삼도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해 겨우 12척의 배만이 빠져나온 뒤로 경상수사 배설은 회령포에서 장군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배설은 장군이 군영 구미에 도착했어도 약속을 어기며 배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기껏 만나서는 핑계를 대며 두려워했다. 장군은 그때의 정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저녁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관할 아래의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나는 뭍으로 내려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다.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1597830)

 

경상수사 배설은 패전의 책임과 함께 전쟁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도망가려고 했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오자, 자신을 지휘했던 지난날의 자기 지휘관을 만나는 걸 꺼려했다. 장군은 그의 그런 마음을 읽고 있었다. 군사를 지휘하고, 바다에서 수많은 왜적선과 싸워 이겨야 하는 지휘관이었기에 속내를 숨기고, 말을 아끼면서 끝까지 배려해 주었던 것이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를 맞아 격파한 이는 영국군의 웰링턴 장군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가리켜 우리의 군대는 지구상의 찌꺼기들로 구성되었다는 혹독한 평을 내렸다. 이 위대한 승리자는 왜 자신의 군대를 모욕적이기 할 정도로 낮춰서 불렀을까? 그것은 그의 군대가 전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 1세의 군대처럼 군사적 혁신과 현대 전쟁전략이 뛰어나서 승리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조국애와 열정으로 뭉쳐 승리를 이뤄냈다. 여기에는 지휘자의 강력한 의지와 그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의 있었기에 가능했다.

 

웰링턴 장군은 영국의 보병과 나폴레옹의 군대가 마주쳐 싸움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될 때 싸움의 현장으로 달려 나가 나의 군대여, 굳게 일어서라. 영국에 다시 돌아간 후 이 싸움에 대해 너희들은 어떻게 말하려는가?”하고 격려의 말을 하곤 했다. 영국군 주력부대가 강력한 프랑스군에 밀려 후퇴하려 할 때에도 나의 계획은 마지막 사람까지 여기 서는 것 뿐이다라며 단호하게 맞섰다. 이처럼 영국군 승리의 배경에는 군사력으로는 밀렸어도 강력한 리더십으로 병사들에게 승리의 비전을 낱낱이 심어 주고, 무한한 격려를 통해 병사들을 결전의지로 불태운 지휘자가 있었다. 이 일화는 지휘자의 리더십이 병사들의 숨어 있는 능력, 영웅다운 요소를 불러내고 이를 고무함으로써,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 능력을 발휘하게 한 점에서 주의 깊게 새겨 둘만 하다. 리더십과 숨어 있는 영웅성(英雄性)과의 놀라운 화학적 결합이 지상 최대의 적을 무찌르게 한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소수의 인재들이 회사를 이끌 것으로 생각하면 그건 거꾸로 된 생각입니다. 보통 사원들이 얼마나 유능해 질 수 있는가를 알고 그들을 칭찬해 주세요. 그럴 때 그들은 놀라운 일을 이루어 냅니다.

 

마케팅 전문가인 잭 스트라우스가 하는 말이다. 아마도 웰링턴 장군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우리의 군대는 지구상의 찌꺼기들로 구성되었지만, 이러한 위대한 찌꺼기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경우에는 구성원의 경력개발과 동기부여, 코칭과 배려를 통해 조직의 단합을 이끌어 내고 싸워 이기려는 의지를 드높였다. 장군이 오늘날 경영자상으로 더욱 의미심장하게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굳은 맹세로 한결같이 신념에 복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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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맹세로 한결같이 신념에 복무하다

 

사람은 누구든 자기 신념을 갖고 있다. 신념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중추이자, 삶의 뿌리를 이룬다. 나아가 대외 활동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곧추 세우는 기준이 된다. 나약한 신념은 쉽게 타협하고, 자기 존재를 잊게 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경영자들의 굳은 신념은 든든한 닻이 되어 아무리 파도쳐도 끄덕 않는다. 장군을 만나러 가며 되새기는 질문이 있다.

이순신적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순신의 힘은 굳은 신념이고, 그 신념은 부드러움과 강함이 어우러지는 리더십의 원형을 이룬다. 장군은 자신과 병사들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졌고, 나라를 구하려는 자기 신념의 실천을 평생 멈추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무관이 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를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 당시 무관보다 훨씬 선호되었던 문관의 길 대신, 장군은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는 무관의 길을 택했다.

무관이 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순탄치 않다. 시험 중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낮은 점수를 기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부상에서 회복하고 연습을 계속한 끝에 결국 시험에 통과했고, 하위 무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요즘 기업 직책으로 말하자면, 첫 시작은 사원급이었다. 그의 나이 이미 30대에 접어든 때였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근무를 전전해야 했지만, 불평하거나 나라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잊은 적이 없다. 장군의 신념의 최전선은 늘 충()을 이루려는 자신에 있었다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하는 이순신의 모습. 왼쪽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서도 의연히 시험을 마친 청년 이순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구경꾼들은 그런 장군의 모습을 합격한 이보다 더 유심히 살펴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현충사에 전시중인 십경도 중 한 장면이다.

    

 

신념의 한결주의원칙

 

무관의 삶을 시작했지만, 일련의 재배치와 진급, 강등이 이어졌다. 이때마다 실망할 만도 했지만, 인내심이 흔들린 적은 없다.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쳤지만, 일에 대한 열정과 조국에 대한 헌신이 꺾인 적도 없다. 조정은 전란을 야기한 무리들의 소굴이었지만, 한 치의 뼈저린 반성도 없었다. 그것은 국왕인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리더십이 의문에 붙여졌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체화된 수신 철학과 확고한 믿음으로 민족사의 희망의 등불을 치켜들었다. 이순신 없었더라면 임진 전란시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순신이 지닌 한결같은 의지와 수신의 자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임란 극복의 중추가 된 그의 신념을 일컬어 애국의 한결주의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훗날 이순신을 고찰한 시인 노산 이은상은 이순신의 진면목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위대한 인격을 완성한 분이자, 우리들의 생활 속에 들어와 살아 움직이고 실천되어야 할 지도자 정신을 가진 분이다.

 

장군에 대해 이보다 더 적절한 평은 없을 것이다. 공직 앞에 개인적 수신과 수양의 철학이 밑받침 됐다. 장군의 일생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노산의 이런 정의에 동의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순신은 자신의 신념을 구체화하고 현재화하는 작업을 평생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저 노량의 칠흑 바다에서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다. 국가와 민족 앞에 멸사봉공하는 삶을 살고자 철저했다. 리더십이 넘치는 시대, 이순신의 현현하는 모습은 신념을 이룩하고자 하는 많은 경영자들의 맹세와 함께 한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분투어린 자기 혁신과 인간됨의 수신에서 나온다. 나는 장군의 진실됨과 진중함의 모습과 만나며 가벼운 세태를 닮아가는 경영자로 내 자신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전쟁은 온통 죽음의 천지였다. 적들의 소행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만행의 짓이었다. 그 앞에 통분하지 않을 지도자가 어디 있겠는가! 한 예로 임진왜란 때 종군한 일본 중 케이넨(慶念)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서 왜적의 만행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지옥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눈에 비치고 있는 일들을 후세 사람들은 꿈에서 조차 모르고 지나게 되리라.

 

왜적들은 조선인 포로들을 원숭이처럼 목에 줄을 매어 무거운 짐을 싣고 끌게 하고, 본 진영에 도착하면 전혀 쓸모없는 소는 필요 없다며 곧 바로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먹어치워 버리기까지 했다. 또한 굶주려서 죽은 시체가 서로 잇달아 굶주린 백성들이 그 고기를 먹기까지(人相食)”했다.(연려실기술17난중시사총록) 전란으로 인한 비참함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파리가 다리를 부비는 까닭은 왜적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비는 것이다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였겠는가. 민간에 퍼진 이런 속언은 왜적에 대한 극도의 저항감을 유감없이 드러내 준다. 이순신의 통분함은 조선 백성의 원한을 갚는 일이자, 인간다움을 올곧게 회복하는 인권 투쟁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하늘에 대고 맹세했다.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의 통분함이 뼛속에 맺혀,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하고 있습니다.

 

 

  왜적 앞의 이 같은 맹세는 장군만의 결의가 아니었다. 조선 백성 누구나 한으로 삼은 맹세였다. 그만큼 왜적의 만행은 짐승의 짓, 그 자체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에 와 있던 예수선교회 일원 중 스페인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땅에서 전쟁을 목격한 유일한 서방인이었다. 그는 임란에 임하는 조선인의 각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꼬라이인(조선인)들은 결코 신하로서 굴복하여 지지 않았으며, 힘으로 만은 절대 꼬라이인들을 억수를 수가 없었다.

 

서구인의 눈으로 바라본 바도 끝내 7년 전쟁이 조선의 승리로 귀결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전국 시대를 갓 지난 일본의 무사집단은 조선은 물론 동북아 평화의 가장 큰 위험요소였다. 이런 일촉즉발의 위기에 이순신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온 몸으로 떨쳐 일어섰던 것이다.

경영이란 시장 내 정의로운 상행위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고 인류 사회에 기여하고, 고용을 촉진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 위한 활동이다. 그것이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다. 이순신 정신의 변함없는 한결주의를 볼 때마다 나는 경영자로서 내 자신의 책무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되새겨보게 된다.ⓒ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신간 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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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이끌림의 인문학>을 냈습니다.

 

보도자료를 올려봅니다.

 

 

 

 

 

 

이끌림의 인문학

세상을 이끌 것인가? 세상에 이끌려 갈 것인가

 

 

 

세상을 이끄는 지식엔

대양을 누비며 바다를 힘껏 때리는 고래의 힘찬 요동이 느껴진다.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갖고 있는가?

폭풍처럼 세상을 휩쓰는 지식, 바람처럼 세상을 어루만지는 지식,

세상을 들쳐 업고 뛰는 지식, 세상의 허위와 기만을 폭로하는 지식,

불의 앞에 떨쳐 일어서는 지식, 지배자에게 항거하게 하는 지식,

호도된 관념 앞에 우뚝 선 이성의 지식, 깊게 사유하고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지식……

이런 지식이 세상을 바꾸고 움직이는 산지식들이다.

행동하는 지식만이 쇠북처럼 쾅쾅 인류사의 어둠을 두드려

빛을 이 세계로 불러냈다.

모든 지식은 보다 인간적인 삶을 이끄는 데 쓰여야 한다.

그런 지식이라면 영혼을 던져 끌어안고 싶지 않은가!

지식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가 지금 당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인문은 무엇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을 집어 들 만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인문은 단연코 깨달음을 주는 것이자, 깨달음을 통해 행동하는 지식, 즉 실천지식을 얻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문은 세상을 이끄는 힘이다. 이 책이 부제로 삼고 있는 세상을 이끌 것인가? 세상에 이끌려 갈 것인가?”도 바로 이와 같은 화두에서 터져 나온다.

 

인문은 인간 존재와 삶을 반추하며, 각 개개인에게 새로운 삶의 각성을 가져올 수 있게 인도하여야 한다. 이것이 인문정신이다. 단무지처럼 단맛만 쪽쪽 빨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티백처럼 계속해서 우러나야 한다. 씹는 맛, 곰삭는 맛이 있어야 한다. 지식과 행동이 유리되지 않고 고구려 성곽의 개이빨식 맞물림 구조처럼 꽉꽉 맞물려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다른 인문서들과 달리 유별나고, 특별하다.

 

이 책은 기존의 인문학 서적들이 담고 있는 교양 차원의 지식을 넘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매우 놀랍고 독창적이며 심지어 생소하기조차 한 지식을 불러와 말 그대로 인문적으로세상과 사물을 새롭게 해석하고 방향성을 찾도록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 ‘포탈에서찾을 수 없는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까닭에 독특하게 성찰, 관찰, 통찰을 주요 키워드로 하여 자아와 사물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남다른 지식과 지혜를 제시한다.

 

이 책에 실린 47개의 각 꼭지는 동·서양을 오가는 씨줄과, 고대·중세·근대·현대를 아우르는 날줄을 통해 저자 고유의 사상을 직조해 나가고, 여기에 시사·수학·과학·예술·심리학·역사·철학 등 방대한 영역에서 다양한 지식을 불러와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하며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47개의 글편은 독자로 하여금 우리를 둘러싼 가시적 현상의 본질을 인문적 눈으로 통찰해 보게 하고, 이를 통해 보다 중층적으로 자기 내면을 훑고 현재를 규명하도록 안내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여 행동을 촉발하는 인문학의 본질에 가장 충실하다. 백과사전처럼 지식을 단순 나열하거나, 위인들, 사상사들의 평전류 내지 자기계발서식의 얕은 주장을 하기보다, 보다 깊게 사유하고 통찰력을 갖게 함으로써 행동하는 지식으로서의 인문학의 새 지평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책을 쥐고 있는 동안 독자들은 책의 부제가 던지는 화두에 계속해서 이끌려 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에 이끌려 갈 것인가? 세상을 이끌어 나갈 것인가?’

당신은 어느 쪽인가?

 

그 답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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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일

1964년생. 인간과 세계, 인문과 대중의 만남을 추구하는 공감의 글쓰기를 해왔다. 인문적 가치와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모색해 오고 있다. 그간 방황하는 청년들, 용기를 잃은 중년층, 경쟁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인문적 깊이로 삶에 천착하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해왔다. 특히 인문과 타 분야의 경계를 허무는 통섭적 관점을 이끌면서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인문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특유의 문학적 사유로 인문·경영의 정수를 담은 30여 권의 책을 써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으로 산다는 것, 창조의 CEO 세종,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남왜공정, 그리메 그린다등이 있다.

이 책 이끌림의 인문학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박물학적 지식을 통해 남다른 사유의 깊이를 제공하고 있다. 현실을 꿰뚫고 나가는 도구로서 지식을 깊이 있게 다루면서도, 다양한 세계 현상 속에서 숨은 본질을 찾아내 인간과 세계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해하고 고양시키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인문이 추구해야 할 가치인 행동하는 지식을 설득력 있게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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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_자아는 성찰하고, 사물은 관찰하고, 세상은 통찰할 때 보이는 것들

 

1부 성찰_자아는 반추하고 내면의 깊이는 톺아보다

공자가 다다른 궁극적 이치

 

우주의 시계방에 걸린 시계들은 모두 잘 돌아가고 있다

저 까마귀는 틀림없이 밀밭을 다 먹어치울 거요

이탈리아 카레지 별장과 조선 송석원의 차이점

초발혁신가가 되려면, 시인을 꽉 붙잡을 것!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창의를 만들어내는 힘

기어오르는 물이 주는 역발상의 교훈

자신과 세상을 변혁시킨 책 떨이와 책 쓰기

셰익스피어와 인도신화, 인간의 정곡을 찌르다

종자를 통해 보는 인류사의 위대한 교훈

늙은 수메르 농부와 조선 농부의 공통 가르침

사막의 유목민에게서 배우는 절제의 미학

5억 마리의 토끼가 휩쓰는 거대한 황무지

히말라야 등반에서 깨닫는 평범함의 위대한 가치

일상의 암묵적 지식이 세상을 구한다

 

2부 관찰_사물과 현상의 속살을 낱낱이 파헤쳐보다

오래된 소나무를 옮겨 심는 법

 

햄버거와 밀크셰이크가 지구를 망친다

터키에서는 피자, 유럽에서는 파스타, 한국에서는 ‘3천 년 빵먹어야만 하는 이유

집단지성으로 바닷길을 연 모리의 항해지도

생물학적 변신과 우주적 컨버징이 낳은 세상

텍사스 유정(油井)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생각하다

탈페라=++오페라의 창조적 발상

우주의 서툰 석수장이는 무엇을 고치는가

고대 수학에서 벌어진 지중해 열병현상

위상수학이 알려주는 겉과 속을 통찰하는 힘

바람이 불려면 어딘가에는 반드시 무풍대가 있어야 한다

날씨를 보는 눈으로 세상을 꿰뚫어 보라

고대 농법이 알려주는 변치 않는 인류사적 지혜

조선 농법에서 배우는 놀라운 초격차혁신의 비밀

동서양 문명사를 가른 정원 조경사

로마의 길은 지금도 계속해서 달린다

학문을 너무 잘게 썰지는 마세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작은 인지력의 차이

이순신 장군의 통섭형 지식과 전략 캠퍼스

남아프리카 대초원에서 만나는 학익진법

 

3부 통찰_매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쏘아보다

아담이 창조한 새로운 세계

 

돼지고기 도시가 만들어 낸 전혀 다른 세상

에디슨 왈, ‘저주받을 자본가 놈들 같으니라구!’

길거리 경제학: ‘길보드 차트를 유심히 볼 것!

확산을 부르는 밑바탕에 깔린 힘, ‘바탕력()’

어디 원숭이나 쥐보다 더 나은 학습법 없소?

세계를 상호 연결할 때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들

사뻬라 베데아레(Saper vedere) 찬양

세계를 읽는 4장의 별난 지도

편지 공화국런던 라이브를 아시나요?

빨판상어를 잡아 죽일 것인가, 돌고래가 될 것인가

그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요?

천체의 법칙을 따라 천지조화를 이룰지니

아침 글자(morning letter)’를 아시나요?

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철학적인 삶을 살 수 있다

 

힌두경전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중에서

 

후기에 붙여_세상과 맞바꿀 수 있는 지식과 가치에 혼을 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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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200여 년간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우리는 인류가 누려온 모든 절기를 포기하고 출근과 퇴근, 평일과 휴일로만 시간을 산다. 시간을 사는 인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표대로 움직인다. 여기에 우주적 시간표는 없다. 그럼에도 태양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물체들은 째깍째깍 울리는 시간 속에서 각자의 생체 시계를 간직한 채 오늘도 살고 있다. 우주의 시계방에 가득 걸린 시계는 각기 크기도, 생김새도, 쓰임새도 다르다. 그들이 가리키는 시간도 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시계들은 모두 다 잘 돌아가고 있다. 모든 시계는 고유의 시간을 가리키며 정해진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이제 보아라, 살아 있는 동안이 그대의 인생이다. -<우주의 시계방에 걸린 시계들은 모두 잘 돌아가고 있다> 중에서

 

경복궁 처마에서 수학 읽기를 하거나, ‘수학으로 동화 읽기차원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기호논리학으로 풀어보고, 또 음계 속에서 수학적 요소를 찾아보는 것들은 기존의 방식과 다른 통합적 사고를 가져온다. 따라서 그 자체로 창의적이다. () 이른바 스펙사회는 이 모든 가치를 압살할 태세로 목전에까지 밀려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 대학에서는 인문학과가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다. 누가 이 같은 암전상태로 학문을 끌고 가는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창의를 만들어내는 힘> 중에서

 

햄버거 하나를 생산하는 데에 3000리터의 물이 필요하고, 밀크셰이크 한 잔을 생산하는 데에는 1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밀크셰이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우유 1리터를 생산하는 데에는 2000리터 이상의 물이 들어가고, () 인간이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더 오래도록 살려면 지금보다 훨씬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엄청난 거리, 석유 자원, 물발자국은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대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가 지구를 망친다> 중에서

 

유전자 조작과 방부제에 절은 수입 밀도 문제지만, 우리 풍토에 적응한 곡분으로 빵을 만들어 먹을 때 느낄 수 있는 맛도 누리기 힘들다. () 터키에서는 피자를, 유럽에서는 파스타나 마카로니를, 한국에서는 ‘3천 년 빵을 먹어야 할 이유는 뚜렷하다. 이 땅이 우리 거라고 주장하려면 여기서 자라는 것들과 무관한 듯 행동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부와 기업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온갖 글로벌주의로 치장하며 우리 것을 말살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터키에서는 피자, 유럽에서는 파스타, 한국에서는 ‘3천 년 빵을 먹어야만 하는 이유> 중에서

 

이 자동차를 타기 싫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만드는 풍요로운 체제를 거부하는 거요.”

일테면 이런 식의 저항할 수 없는 하나의 공고화된 이념을 만들어 내고 이를 프로파간다화한 것이다. 이 같은 발상은 20세기에서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적지 않은 자본주의의 여정 동안 포디즘(Fordism)이 함의해 왔던 성과와 그 이면의 모든 것들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갈등의 근간이 되고 있다. 지구 상 대부분 인간들이 하나의 부품으로서 자기 앞에 밀려오는 수많은 부품들을 다루기 위해 매일같이 컨베이어벨트 앞에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돼지고기 도시가 만들어 낸 전혀 다른 세상> 중에서

 

최근 뉴욕을 방문한 한 지인은 월가의 패스트푸드점에서 다소 높은 가격의 샌드위치가 투고되고 있다고 전했다. 몰려드는 객장 주문과 고객 문의로 점심시간을 길게 낼 수는 없지만 더 나은 음식을 먹고자 하는 주머니 사정이 반영된 것이다. 그야말로 길거리 경제학이다. 경제 흐름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지만, 이렇듯 눈에 보이는 경기선행지수를 통해 삶의 현장에서 경기 흐름을 익힐 수도 있다. 세상을 폭넓게 읽는 방법 중 하나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경제 현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세상의 속살이 중층적으로 보인다. -<길거리 경제학: ‘길보드 차트를 유심히 볼 것!> 중에서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란 유럽과 미국에서 원거리 편지 교신으로 지식과 감성의 공감대를 형성해 온 문화적 공동체를 지칭한다. () 이때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17, 18세기 유럽과 미국의 계몽주의 인사들이다. 이들은 원거리 편지 교환을 통해 당대의 지성으로서 지식과 감성을 서로 나눴고, 교류의 폭을 점차 확장시켜 문화·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 e메일이 없던 시절, 당대 사상을 대표했던 유명 인사들의 편지는 그 자체가 역사적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상의 특정 시간대에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의 수·발신 위치를 세계지도 상에 표시하면 세기를 바꾼 사상의 흐름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서신은 배편으로 전 세계 수신인들에게 가닿았고 세대를 초월해 공유되었다. -<‘편지 공화국런던 라이브를 아시나요?> 중에서

 

현실은 죽여야 창조할 수 있다.”

생각이 아닌 행동만이 세상을 바꾼다. 철학적 삶은 행동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지금처럼 결의와 행동에 굼뜨다가는 청신한 나무가 썩어갈 뿐 아니라, 썩은 나무가 눈앞에서 자라나는 꼴마저 보게 될 것이다. 혁명 없이는 결코 혁명을 낳을 수 없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철학적인 삶을 살 순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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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관찰·통찰이 부르는 행동하는 지식

무지와 신자유주의에 맞서 우리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행동 지식!

 

이 책은 이런 분들이 손에 쥐면 좋다.

 

열심히 사는데도 세상에 왜 마구 끌려 다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은 독자라면,

발상 전환, 창조적 사고로 사물과 세계의 저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고 싶은 독자라면,

웬만한 인문학 관련 서적은 다 읽어서 뻔하다고 생각하거나, 인문학이 나와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시간도 없고 바쁘니 단 한 권의 인문학 서적으로 인문학의 정수를 꿰뚫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손에 쥐고 며칠만 독파하면 된다.

 

독자들은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해서 뭔가를 곱씹게 되고, 새로 우러나는 것들이 머리에 청신한 샘물처럼 가득 차오를 것이다.

나아가 지적으로 업(up)되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지닌 놀랍고도 획기적인 매력이 이것이다.

, 이런 게 있었나!” 싶을 만큼 세상에 처음 보는 지식, 깊이 있고 멀리 내다보는 통찰력을 가져오는 지식! 나와 세계가 달라 보이는 발견의 지식들을 보게 된다.

독자들은 47개 꼭지, 400여 쪽에 걸친 지식의 대향연을 통해 예전에는 감히 경험하지 못하였던 눈이 번쩍 뜨이는 새로운 인문의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생각해 내었지?”

인문학적 통찰이 번뜩이는 주옥같은 지식들!

 

이끌림의 인문학은 예리한 관찰의 메스와 정교한 통찰의 현미경으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영역을 파헤쳐 들여다본다.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뚫고 나갈 지식을 선물한다. 감성적 성찰이 아닌, 날카로운 지식으로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각성을 이루도록 돕는다. 부제가 밝히듯, 세상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주도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끌고 가려는 이들을 위한 인문학적 통찰이 번뜩이는 안내서이다.

 

이끌림의 인문학이 주장하는 이끎의 의미는 이 점에서 남다르다. ‘세상에 이끌려 가는세태를 경계하고 세상을 이끌어 가는새로운 지식을 통해 새로운 실천지식으로 맞설 것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창조적 사고가 태어난다. 저자가 혁명을 통해서만 혁명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끌림의 인문학은 현대인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메시지로 가득하다. 세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행동 인문학을 제시하며, 이를 위한 도구로서 다양한 사례와 소재, 인물과 사상을 끌어 온다. 물론 이는 르네상스형 지식을 추구해 온 저자의 심도 있고 광범위한 연구에 기인한다. 이렇듯 저자는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성을 갖추도록 세상이 잘 모르는 지식으로 자기 각성을 불러온다. 이를 통해 국가, 기업, 개인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젖힐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 나온 인문학 관련 서적과는 전혀 다르다. 완전히 차별화되어 있다.

 

인문학 이름을 달고 서점에 나오는 대부분 도서들은 그저 유명한 사상가나 철학자 등의 연구를 인용·요약하고 일부 자신의 생각을 첨삭한 독서서평수준에 불과하다. 비슷한 지식 열병식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지식 나열형 기획에 매달리다 보니 다루고 있는 인물, 출처도 대동소이하다. 지식 면에서 독자들에게 혁명적인 발상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 결과, 독자들에게 인문학이란 독서서평의 수준에 그치는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독자들은 보다 깊이 있는 세상을 밝히는 행동지식을 찾고 있지만 이 같은 갈증을 해소해 줄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테면 인문학 시장은 있지만, 이를 밑받침할 이렇다 할 콘텐츠는 없는 셈이다.

 

 

그런 독자들은 이 책 이끌림의 인문학한 권만 손에 쥐면 된다!

 

이끌림의 인문학은 유구한 역사에서 인류가 쌓아 온 지식을 끌어들여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연료로 활용하고 있다. 창조적 사고로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지닌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신지식을 제시하기도 한다. 관점부터가 다르다. 이 본질적 차이야말로 인문의 이름으로 마땅히 수행해야 할 바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저자는 인터넷 검색으로는 찾아보기 힘든 47가지 박물학적 지식을 발굴해 이를 통해 통합적 지식을 제시하고, 행동하는 지식으로서의 인문학을 보여준다. 인문학의 새로운 자리매김이 감히 이 책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다.

 

단순히 알거나, 아는 체하는 지식이 아니라, 이제 알았으니 행동하라는 서슬 퍼런 각성과 실천의 죽비를 내려치는 지식들만을 모았다. 독자들은 새로운 일깨움을 주는 지적 자극에 이 책 이끌림의 인문학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 책의,

1[성찰] 에서는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자아를 돌아보게 하는 글편이 자리 잡고 있다. 우주를 장구히 흐르는 시간, 예술가들의 영감 세계가 미친 영향, 셰익스피어와 인도신화에 나타나는 인간관 등이 자아와 인간을 성찰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2[관찰] 에서는 사물과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 세상을 더 깊게 보기 위한 토대를 제시한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 등 패스트푸드 먹을거리가 초래하는 환경 문제, 탈페라=++오페라의 창조적 발상, 태풍 등 날씨를 통해 배우는 세상사의 원리, 남아프리카 초원에서 발견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법 등은 독자로 하여금 세상을 꿰뚫는 넓은 시야를 갖게 한다.

 

3[통찰] 에서는 변화를 위해 떨치고 일어나야 하는 행동하는 지식으로서 인문학을 보다 강렬하게 드러낸다. ‘돼지고기 도시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과 자본이 화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편지 공화국런던 라이브를 통해서는 유럽과 한국사를 잇는 지적 연결고리를 통찰하며, 훈민정음의 원리에서 뜨거운 사랑의 마음과 종교적이기조차 한 그들의 문자 세계관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통찰이 들끓는 도가니이자, 거푸집이다.

 

약탈적 자본주의와 빈부의 심화, 성장과 분배 논리의 대립, 비정규직 문제 등 우리 사회를 둘러싼 온갖 문제들에 대해 이 책에 실린 글편은 차원 다른 각성과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은

세상을 주도적으로 이끌려는 이들,

기존의 낡은 세계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려는 이들,

새로운 인문학 도서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뚜렷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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